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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설날을 앞둔 날 밤의 꿈

by 답설재 2025. 1. 29.

비상(飛上)

 

 

 

러시아에 대한 수업으로 정할까 싶었다.

러시아?

광활한 그 영토나 역사, 문화, 유명한 독재자, 소설, 음악, 옛 소련,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등 설명할 내용은 많지만 막상 설명하려고 하면 5분이나 10분쯤이면 끝장날 것이다.

그나마 아이들이 경청할 리 없다.

 

그럼 어떻게 하나?

차라리 아이들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이다. 수업방법으로도 옳다. 요즘 세상에 아는 척하며 설명이나 하는 교사가 어디 가서 명함을 내겠나.

아이들은 아는 것도 많지만 호기심, 관심, 의욕 등등 이야기의 촉매제가 다이너마이트 같을 뿐만 아니라 듣고 보고 읽은 것들이 그들 각자의 창고에 가득가득 쌓여 있다.

 

혹 입을 열지 않으면?

그럼 외부의 촉매제를 제공해 줄 필요가 있다. 가령 러시아 지도!

러시아 지도는 귀하니까 아시아 지도!

아시아 지도에는 유럽 쪽 러시아 영토가 다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 아시아·유럽 지도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렇게 두 대륙을 다 보여주는 지도도 본 적 없으니까 세계지도! 혹은 지구본!

 

인터넷에 들어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이나 전쟁 상황을 나타낸 지도를 다운로드해서 보여줄 수도 있겠다.

러시아 음악을 들려주거나 관광지 사진을 보여주거나 가령 "닥터 지바고" 같은 소설책을 보여주어도 좋겠지? 신기해 하겠지?("이거 유명한 소설이야! 나중에 읽어봐. 그 대신 그 영화 OST 한번 들어볼래?")

또 있겠지? 많겠지? 그렇지만 나는 녹이 슬어서 얼른얼른 생각나지 않는다.

 

어디 연구실 같은 곳에서 그런 구상을 하다가 잠이 깨었다.

1월 28일 새벽이니 음력으로는 그믐이다.

그날 밤엔 기억에 남은 꿈을 꾸지도 못했으니 그게 새해를 맞이하는 꿈이었는가?

그렇다면 내 꿈은 내용상 참 허접하다.

 

일생을 교단에 바쳤다느니 뭐니 하지만 나는 교직 41년 중 담임을 한 건 겨우 17년에 지나지 않는다. 2년은 한 학기씩만 가르쳤으니 후하게 쳐도 17+0.5+0.5년이다. 사실은 그 0.5년에 나에게 배운 아이들에게는, 그들이 맞대놓고 무책임하지 않았느냐고 해도 할 말이 없다. 학적부에는 내 이름이 한 학기 담임으로 나와 있을 리 없고 잘하면 1학기 통지표엔 내가 담임으로 되어 있겠지만 그 통지표를 갖고 있을 아이가 없을 테니까 언제 그랬느냐고 딱 잡아뗄까?

그건 아니다! 그 한 학기씩이 사실은 내 가슴속에 아주 인상적으로 박혀 있다. 나 스스로 부정할 수는 없다.

어쨌든 확실한 담임은 17년이다.

 

나머지 세월은 아이들 곁에 없었거나 잘해봤자 5.5년은 교장이었다.

교장이었을 때는 가능한 한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는 교장이 되려고 했지만 어느 아이, 어느 학부모, 어느 교사가 그걸 기억해 주겠나!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아이들 가르치는 꿈을 꾼다.

그 17년이 나에겐 그렇게 자극적이었었나?

모르겠다. 혼자 이렇게 반추하며 살아갈 뿐이다.

두고두고 아이들 가르치는 꿈이나 꾼다.

이번 꿈은 내겐 을사년도 역시 그렇다는 메시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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