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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사랑58

《순수 박물관 1》 오르한 파묵 《순수 박물관 1》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0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더라면 그 행복을 지킬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을까? 그렇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더라면, 절대로, 그 행복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깊은 평온으로 내 온몸을 감쌌던 그 멋진 황금의 순간은 어쩌면 몇 초 정도 지속되었지만, 그 행복이 몇 시간처럼, 몇 년처럼 느껴졌다. 1975년 5월 26일 월요일, 3시 15분경의 한 순간은, 범죄나 죄악, 형벌, 후회에서 해방되는 것처럼, 세상이 중력과 시간의 규칙에서 해방된 것만 같았다. 더위와 사랑의 행위로 땀에 흠뻑 젖은 퓌순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고 천천히 그.. 2020. 7. 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Ⅱ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로리타》 신동란 옮김, 모음사 1987(13판) 롤리타.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경스럽다는 느낌? ‘불경’은 아니지? 외설스럽다? 외설? 아니지! 외설하고는 다르지! 그럼? 소녀(여성?)의 이름은 국어사전에도 들어 있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 작가 나보코프(Nabokov, V.)가 1955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파격적인 소아 성애를 묘사하여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으며, 한때 판매 금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 다시 발간되었을 때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오늘날 소아 성애를 가리키는 롤리타 콤플렉스가 일반 명사가 되었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나는 이 책을 '버젓이'(?) 들고 다니며 읽진 않았다. "(…) 아아 이름이 아주 예쁘구나 / 계속 부르고 싶어 / 말하지 못하는 / 나쁜 .. 2020. 6. 14.
《호랑이의 아내 The Tiger's Wife》 테이아 오브레트 《호랑이의 아내 The Tiger's Wife》 왕은철 옮김, 현대문학, 2011 1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그다음 날 아침부터 40일에 이르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 여정이 시작되기 전날 밤, 영혼은 땀내가 밴 베개에 가만히 누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눈을 감겨주는 모습을 지켜본다. 또한 문과 창문과 바닥의 틈새로 영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방 안을 연기와 침묵으로 가득 채우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혼이 강물처럼 집 밖으로 흘러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사람들은 동이 틀 무렵 영혼이 자기들을 떠나 과거에 머물렀던 곳, 즉 젊었을 때의 학교와 기숙사, 근대 막사와 주택, 허물어졌다가 다시 지어진 집들, 그리고 사랑과 회한, 힘들었던 일들과 행복.. 2019. 10. 21.
최인훈 《광장》 최인훈 《광장》 문학과지성사 1996(3판12쇄) 서 문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 년래의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광장에 대한 풍문도 구구합니다. 제가 여기 전하는 것은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우리 친구의 얘깁니다. (……) (『새벽』, 1960년 10월) 1961년판 서문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 2018. 11. 26.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전은경 옮김, 들녘 2014 1 라틴어, 헤브라이어, 그리스어에 능통한 교사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57)는 한때 제자였던 젊은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책 읽기와 고전문헌학이 전부인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런 그가 비 내리는 날 아침 출근길에 키르헨펠트 다리 위에서 한 포르투갈 여인을 만납니다. 신비감을 품은 그 여인은 자살을 시도한 직후였습니다. "모국어가 뭐지요?" 그는 조금 전에 이렇게 물었다. "포르투게스(Portugués)." '오'는 '우'처럼 들렸고, 올리면서 기묘하게 누른 '에'는 밝은 소리를 냈다. 끝의 무성음 '스'는 실제보다 더 길게 올려 멜로디처럼 들렸다. 하루 종일이라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 2018. 10. 17.
"개사랑합니다!" 1 '존나(졸라)' 이야기를 쓰고 난 다음 "우리말 123"이라는 사이트에 '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걸 봤습니다. 우리말에서 '개'는 앞가지(접두사)로 쓸 때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이라는 뜻으로 개금, 개꿀, 개떡, 개먹, 개살구, 개철쭉처럼 씁니다. 2. (일부 명사 앞에 붙어) '헛된', '쓸데없는'이라는 뜻으로 개꿈, 개나발, 개수작, 개죽음처럼 씁니다. 3. (부정적 뜻을 가지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한'이라는 뜻으로 개망나니, 개잡놈처럼 씁니다. '개좋다'는 아마도 '무척 좋다'는 뜻인 것 같은데, '개'가 부정적 뜻을 가지는 일부 이름씨(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 2018. 7. 29.
「사랑」 사 랑 김 언 그건 내게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을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주어야 사랑이라고 한다. 그것이 무어든 그것은 내게 없는 것이어야 하고 네게 주어야 하는 것이고 네게 줄 수 없다면 다른 것은 필요 없다. 내게 없는 것이어야 한다. 내게 없는 것만 있다. 내게 없는 것만 네게 줄 수 있는 것. 그걸 꺼내어 네 품에 안겨주는 것. 내게 없다는데도 바다처럼 흔한 것. 바다처럼 넓은 것. 바다처럼 깊고 빠져나올 수 없는 그것을 다시 꺼내어 네게 안겨주는 것. 바다는 멀다. 바닷가 출신에게도 멀다. 줄 수 없기에 가질 수 없는 것. 가질 수 없기에 주어야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배운다면 참으로 난감한 바다가 멀리 있다. 만질 수 없는 바다.. 2018. 1. 4.
사랑의 여로 그는 물리학을 사랑했습니다. 어쩌면 명예와 화려한 활동도 사랑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합니다. 사랑이라니! 그가 사랑한 대상은 오래전에 떠난 그의 부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 얘기를 해도 좋을 때, 그런 장소에 앉게 되면, 그는 먼 나라의 유명한 대학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그의 연구실 얘기도 하고, 한시도 잊은 적 없다는 그의 부인 얘기도 합니다. 그가 지금 그 먼 나라에 있지 않고 여기 우리 동네에 와 있는 것도 사실은 그 부인과의 추억이 너무나 생생해서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명예? 국가·사회적 활동? 분명히 그런 것도 좋아하긴 했습니다. 멋진 나라들의 음식 얘기도 하고, 부인과 함께 그런 나라의 한적하고 행복한 길을 걸은 얘기도 하고…… 여러 나라 대통령을 만난 .. 2017. 9. 12.
사랑도 배워야 할 수 있다 "가엾은 폴! 이렇게 늦은 나이에 수도승처럼 살다가 이제는 마음까지 편치 않다니! 애를 돌보려 하다니 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에요! 추상적으로는 어린 드라고를 사랑하고 싶겠죠. 하지만 현실이 그걸 계속 가로막는 거예요. 폴, 우리는 의미만 갖고서는 사랑할 수 없어요. 우리는 배워야 해요. 영혼들이 높은 곳에서 내려와 다시 태어나겠다고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예요. 우리와 벗하며 커가면서, 사랑의 어려운 길을 따라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죠. 처음부터 당신은 천사와 같은 뭔가를 드라고에게서 보았죠. 당신이 틀린 건 아니에요. 드라고는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더 오랫동안, 세속을 벗어난 본질과 맞닿아 있었어요. 당신의 실망감과 노여움을 극복하세요. 가능할 때 드라고에게서 배우세요. 조만간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영광의.. 2017. 7. 31.
마누엘 푸익 《조그만 입술》 마누엘 푸익 《조그만 입술》 송병선 옮김, 책세상 2004 1 '레테'는 연옥 입구의 강이랍니다. 언젠가 연옥은 없는 것으로 정했다는 글을 읽은 것 같은데 그러면 지옥도 그렇게 될 수 있겠지요? 하기야 천국이고 천당이고 뭐고...라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리움", "그리움" 하지만 레테가 생각날 때보다 더 큰 그리움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걸 다 잊게 된다? 어떻게? 이 누추함까지 다 떨쳐버릴 수 있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아무리 험난한 저승에서라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잊지는 않아야 할 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 모든 것 다 내어주더라도 그 기억만은 간직하고 싶다면 그 강변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어놓아야 할 그 순간 그가 얼마나 그리울지, 생각만으로도 나는 눈물을 글썽.. 2016. 12. 24.
《1984》 조지 오웰 장편소설 《1984》 George Orwell : Nineteen Eighty-Four 김기혁 옮김, 문학동네 2016(2판19쇄) Ⅰ '소설이다' '소설일 뿐이다' 하며 읽는데도 자주 그 상황이 실제 같아서 빠져들며 읽었다. 공포감이 엄습했다. 자신이 인간이란 게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인간이 권력 앞에서 어떻게 절망하고, 패배하고, 파멸해 가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금 이 세상은 이 소설 속 세상의 다음 세상인가? 그렇다면 좋겠지만, 앞으로 이런 세상이 올 수도 있다는 건 아닐까? Ⅱ 세계는 오세아니아와 유라시아, 동아시아의 3대 초강대국으로 나뉘어 전쟁을 하고 있다. 전면전이나 종전도 없고 승리도 패배도 없이 줄기차에 계속되기만 하는 전쟁. 구호는"전쟁은 평화"다. 오세아니아는 당이 .. 2016. 9. 21.
도스토예프스키 《백야》 F. M. 도스토예프스키 《백야》 이상각 | 인디북, 2009 Ⅰ 나스첸카, 우리는 그토록 오랜 세월을 헤어졌다가 만난 두 영혼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천 년 전에도 이미 당신을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심정이랍니다. 나스첸카, 어쨌든 나는 오랫동안 누군가를 찾아 헤맸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분명하게 당신을 찾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나도록 되어 있었다는 증거 말입니다.(44) 밤이 깊어 헤어져야 할 시각이 다가왔을 때, 서로의 품에 안겨 폭풍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눈썹에서 눈물방울이 흩날리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설움의 격정 속에 잠겨 있던 것은 과연 그녀가 아닐까요? 이런 모습을 한낱 꿈이라고 외면해 버릴 수 있을까요?(51) 미모나 성품이나 뛰어난 여성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2016. 6.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