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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사랑63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유숙자 옮김, 민음사, 2002 이 찬란한 여름에 설국(雪國)'이라니! 둘러댈 이유를 찾아볼까 싶었지만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밖에는 없습니다. 1980년대의 어느 날, 석박사 학위논문 계획 발표회에서 사창가 여성들의 이동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겠다고 하던 학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는 사창가 여성을 구경한 적이나 있을까 싶은, 남성의 특징을 고루 구비하고 있기나 한지 확인해보고 싶을 만큼 '얌전한'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그런 곳을 찾아다니며 조사하겠다는 건지…… 이젠 그 학자가 누군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문제를 파헤쳐 발표하는 표정은 심각하지만 정작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는 불분명한, 한심한 학자가 아니면 좋을 것입니다. ♬ 이 사랑 이.. 2014. 9. 1.
버트런드 러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버트런드 러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최혁순 옮김, 문예출판사 2013 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정리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단순하긴 하지만 압도적으로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생애를 지배해왔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지식의 탐구, 그리고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열정이 마치 거센 바람처럼 제멋대로 나를 몰고 다니면서 번민의 깊은 바다를 이리저리 헤매게 했고 절망의 극한에까지 이르게 했다. 내가 사랑을 추구해온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황홀한 열락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몇 시간에 불과한 이 즐거움을 위해 내 남은 인생 전부를 희생하려 했던 적이 종종 있었을 만큼 사랑의 열락은 대단한 것이다. 내가 사랑을 추구해.. 2014. 7. 20.
케이트 디카밀로 『신기한 여행』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 케이트 디카밀로 글·배그램 이바툴린 그림/김경미 옮김, (비룡소, 2009, 2014 1판13쇄) 드러내놓고 이런 책을 보려면 눈치가 보이는 나이가 되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거의'내 마음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이럴 때도 있나?' 싶어서 신기하고 행복합니다. 그것은, '내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서 더욱 좋습니다. 또 동화책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생각나는 것을 이렇게 적어 두는 것입니다. ♬ 27장 다음의 '맺음말'이 마침 줄거리 소개와 같아서 옮겨보겠습니다. 옛날에 토끼가 있었어요. 토끼는 어린 여자아이를 사랑했고 그 아이가 죽어 가는 걸 지켜보았어요. 그 토끼는 멤피스 거리에서 춤을 추었어요. 그리고 어느 식당에서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지만.. 2014. 6. 8.
저 아이들을 사랑하기로 하자(2014.4.28) 저 아이들을 사랑하기로 하자 그해엔 1학년을 담임했다. 초등학교 1학년이란, 무슨 볼일들인지 고물고물 끝없이 기어 다니는 개미들 같고, 뱅글뱅글 맴도는 앙증맞고 야단스런 풍뎅이 같은가 하면, 팔랑거리며 날아다녀봤자 잡히는 순간 가루로 바스러질 나비 같았다. 그런 것들에게 아.. 2014. 4. 27.
저 이쁜 부부 운동복 차림에 허름한 모자를 쓰고 산비탈을 오릅니다. 저기쯤 앞에 오순도순 젊은 부부가 가고 있습니다. 뒤따르는 아내의 두 팔이 '팔랑팔랑' 나비날개처럼 움직여 오르막인데도 발걸음이 가벼워 보입니다. 그러다가 내가 뒤따르는 걸 눈치 챘는지 걸음이 좀 빨라지는 듯했고, 이내 남편이 뒤에 섰습니다. 내가 아무래도 음흉해 보이는가보다 싶었고, 공연한 추측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나는 무슨 볼일이나 있는 것처럼 멈춰 서서 먼 산을 좀 바라보며 어슬렁거리니까 이내 저만치 뒤처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오르면 안 되겠다 싶은 곳에서 골짜기를 벗어나 큰길로 나섰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그 부부를 보았습니다. 그 길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좀 흉측해 보이는 내가 뒤따르는 걸 이번에는 눈치 채지 못했는지 무슨 얘기.. 2013. 10. 13.
김혜순 「눈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김 혜 순 그가 핀셋으로 눈물 한 방울을 집어 올린다. 내 방이 들려 올라간다. 물론 내 얼굴도 들려 올라간다. 가만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으면 귓구멍 속으로 물이 한참 흘러들던 방을 그가 양손으로 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가 방을 대물렌즈 위에 올려놓는다. 내 방보다 큰 눈이 나를 내려다본다. 대안렌즈로 보면 만화경 속 같을까. 그가 방을 이리저리 굴려본다. 훅훅 불어보기도 한다. 그의 입김이 닿을 때마다 터뜨려지기 쉬운 방이 마구 흔들린다. 집채보다 큰 눈이 방을 에워싸고 있다. 깜박이는 하늘이 다가든 것만 같다. 그가 렌즈의 배수를 올린다. 난파선 같은 방 속에 얼음처럼 찬 태양이 떠오르려는 것처럼, 한 줄기 빛이 들어온다. 장롱 밑에 떼지어 숨겨놓은 알들을 들킨다. 해초.. 2013. 9. 5.
김윤식 「동백이라는 꽃」 동백이라는 꽃 김윤식 이렇게 멀리 내려왔으니 사랑 한번 하자고 하는 것 같아 붉은 비애悲哀의 노래 한 곡 부르자는 것 같아 노을 아래 잔 내려놓고 반들거리는 잎 벗어 몸 차갑게 하고 나서 꽃처럼 툭 눈 감고 남해南海 청동靑銅 시퍼런 바다에 떨어져 죽자는 것 같아 ──────────────── 김윤식 1947년 인천 출생. 1987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고래를 기다리며』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 저문 종소리를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길에서 잠들다』 『청어의 저녁』 등. 『현대문학』 2012년 3월호(172~173쪽)에 실려 있습니다. "아름답다"고 하고 싶은데 적절한 말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다시 한 번 한 줄 한 줄 읽어내려 가 보면, 역시 그런 단어 하나 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어집니.. 2012. 11. 27.
가을엽서 Ⅸ - 가는 길 저 쪽 창문으로 은행나무가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깜짝 놀라 바라보았더니 그 노란빛이 초조합니다. 올해의 첫눈이 온다고, 벌써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고, 마음보다는 이른 소식들이 들려와서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다른 출구가 없다는 것이 더 쓸쓸하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젠 정말 이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돌아보면 화려하고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정말이지 그걸 알 수가 없었습니다. 멍청하게 세월만 보낸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이제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못마땅할 것입니다. 다른 출구가 없다는 것이 마음 편하기도 합니다. 순순히 내려가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마음만이라도 따뜻하게 가지고 있겠습니다. 딴 마음이 들면 얼른 정신을 차리겠습니다. 그럼. 2012. 11. 16.
제라르 드 네르발 『실비/산책과 추억』 제라르 드 네르발 『실비/산책과 추억』 이준섭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Ⅰ 『실비』 『산책과 추억』 두 편이 실려 있는 책입니다. 지은이의 일생에 대한 소개가 인상 깊었습니다. 프랑스 남부 출신의 한 남자가, 북부로부터 와서 발루아 지방에 정착한 가문의 처녀와 결혼해서 이듬해 한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아이를 발루아 지방의 어느 유모에게 맡기고 나폴레옹을 따라 전장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 아이는 1808년 5월 22일 파리의 생마르탱 가 96번지에서 태어났고, 자라서 1855년 2월 26일 새벽 파리의 으슥한 골목에서 목매어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죽은 후 오래지 않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20세기 초가 되자 그의 작품 속에서 놀라운 것들이 발견되기 시작했.. 2012. 11. 7.
신은영 「만약에」 만약에 신은영 당신을 사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언제, 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나를, 이라고 묻지는 않으시겠지요 당신에게 자유란 무엇입니까 당신이 시를 읽는다면 혹은 쓴다면 당신은 반드시 속았습니다 난 한 번도 시에 진실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진실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그 전에 당신께서 진실을 마주할 생각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니면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으신가요 당신을 사랑한 사람은 당신을 위해 생명을 주었습니다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영원히 산다면 어떻겠습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은 인정할 것입니까 당신은 당신을 택할 것입니까 그를 택할 것입니까 당신을 위해 죽은 한 사람을 알게 된다면 자신이 왕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한평생 누군가의 보살.. 2012. 10. 8.
슈테판 츠바이크 『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이별여행』 배정희·남기철 옮김, 이숲, 2011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로랑 세크직, 현대문학, 2011)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주인공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이야기다. 세계 3대 전기작가 중 한 명이라는 말도 있다. 표지부터 좀 재미있다. 웃기는구나 싶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찍은 사진일 것 같진 않고, 2011년 그러니까 지난해에 유럽에서 영화로 제작 중이라고 했으니 제작 중인 그 영화의 선전물인가 싶기도 하지만 추측일 뿐이다. 이 표지 때문에 남들 보는 데서 읽기가 좀 난처했다. 남녀 간의 모습을 보여주려면 이보다는 좀 품위 있는, 혹은 차라리 더 선정적인 사진을 구했더라면 싶었다. 저게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원…… ♣ 루트비히는 굴욕적인 가난으로 얼룩졌던 어.. 2012. 7. 13.
허윤정 「노을에게」 노을에게 허윤정 바람은 꽃도 피워 주며 사랑의 애무도 아낌없이 하였다 잠시잠깐 떨어져 있어도 살 수 없다던 너 작은 일에도 토라져 버린다 이렇게 해지는 오후면 노을은 후회처럼 번지고 새들은 슬픈 노래로 자기 짝을 찾는다 이대로 영원일 수 없다면 우리 어떻게 이별할 수 있을까 사랑아 우리 기꺼이 이별 연습을 하자 나 또한 지워져 버릴 너의 연가 앞에서 저 물든 노을은 분홍 물감을 흩뿌리듯 강 건너 먼 대숲 산모롱이 누가 손을 흔든다 "잠시잠깐 떨어져 있어도 살 수 없다던 너/작은 일에도 토라져 버린다" 그러니까 -걸핏하면 토라져 버리니까- 모두들 그 사랑에 관하여 토로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그 덧없음이란…… 그러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노래는 우리의 가슴 저 깊은 곳까지 울려오는 것이겠지요. .. 2011.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