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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Known』

by 답설재 2015. 1. 27.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Known』

정현종 옮김, 물병자리 2002

 

 

 

 

 

 

당신이 모르는 것을 두려워할 수 없는 까닭은 당신이 그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며, 따라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다. 죽음은 말이며, 공포를 낳은 것은 이 말이요, 이미지이다. 그러면 당신은 죽음의 이미지 없이 죽음을 볼 수 있는가? 생각이 솟아나는 원천인 이미지가 존재하는 한, 생각은 언제나 공포를 낳는다. 그러면 당신은 죽음의 공포를 합리화하고 그 불가피한 것에 대항하든가 아니면 당신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믿음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당신과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 사이에는 틈이 있다. 이 시공(時空)의 틈 속에 공포, 불안, 자기 연민인 갈등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키우는 생각은 이렇게 말한다.

"그걸 미루자. 그걸 피하자. 될 수 있는 대로 생각하지 말자."

그러나 당신은 생각하고 있다. 당신이 "나는 그걸 생각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 때, 이미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피할까를 생각한 것이다.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한 까닭은 당신이 그것을 뒤로 미루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에서 분리된 삶을 살고 있으며, 삶과 죽음 사이의 간격이 바로 공포다. 그 간격, 그 시간은 공포가 낳은 것이다. 삶은 황홀한 바다로 향한 창을 가끔 여는 나날의 괴로움, 나날의 모욕 그리고 슬픔과 혼란이다. 우리는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죽음이란 고통과 불행의 그 비참함을 끝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부딪치는 것보다는 아는 것―우리의 집, 우리의 가구, 우리의 가족, 우리의 성격, 우리의 일, 우리의 지식, 우리의 명성, 우리의 외로움, 우리의 신―에 매달린다. 그것들은 그것 자체의 쓰라린 실존의 틀에 갇혀서 그 속에서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우리는 삶은 항상 현재 속에 있고 죽음은 먼 시간 저쪽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대체 이 나날의 삶의 싸움이 삶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물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윤회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어하고 영혼의 살아남음에 대한 증거를 원하며, 천리안(千里眼)의 주장과 심령 연구 결과에 귀를 기울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결코 묻지 않는다.

…(중략)…

우리는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며, 따라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삶을 두려워하는 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불안전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안전이 없다는 것을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안전이 없으면 끝없는 움직임이 있으며 그래서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 갈등 없이 사는 사람, 아름다움과 사랑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가족, 기억, 당신이 아는 모든 것에 대해서 죽음을 택한다면, 그때의 죽음은 정화(淨化)이며 다시 젊어지는 과정이다. 그 죽음은 천진성을 가져오고, 오직 천진한 사람만이 정열적이다. 하지만 죽은 뒤에 일어나는 일을 믿거나 알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중략)…

죽는다는 것은 완전히 마음을 비우는 것을 뜻하며, 그것의 일상적인 소망, 쾌락, 괴로운 격정들을 비우는 것이다. 죽음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요 변화이며, 그 안에서 생각은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생각은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을 때 거기엔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곧 죽음이며, 그러면 당신은 살고 있는 것이다.1

 

 

 

  

 

 

 

두 번째 읽으면서도 이미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읽었습니다. '이 책은 꼭 읽어야 할 책인데……' 하고 꺼내어 읽다가 오탈자를 바로잡아 놓은 걸 발견하고2 '어떻게 이처럼 까맣게 잊을 수가 있는가!' 했습니다.

치매로 가는 길일 수는 있어도 치매는 아닐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모른 채 읽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그렇겠다고 생각하면 곧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하게 됩니다.

 

 

 

 

가령 '아름다움'은 이런 것입니다.3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나무,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움, 건물 또는 아름다운 여자와 같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가슴과 마음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때에만 아름다움은 있다."(136)

 

그렇다면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4

 

"당신과 당신이 바라보는 것 사이에 거리가 있을 때 거기엔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당신이 세계를 개혁하려 하거나 새로운 사회 질서를 가져오려고 해도 또는 아무리 당신이 개선에 관해 말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단지 심한 괴로움만 만들어낼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지도자도 없고 선생도 없으며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은 이 광적으로 잔인한 세계에 홀로 서 있다."(150)

 

이제 '아름다움'이나 '사랑'에 관해서 알게 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또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이 모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신은 그것에 관해 말하고 그것에 관해 쓰지만, 드물게 완전히 자기 포기할 때를 제외하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안 적이 없을 것이다. …(중략)… 당신이 사랑할 때 당신이 아름다움이다."(148)

 

 

 

 

더구나 이렇게 다그치듯 했습니다.

 

"당신은 이 책을 덮는 순간 이것을 잊거나 아니면 어떤 구절을 기억하고 되씹어보거나 또는 여기서 읽은 것과 다른 책에서 읽은 것을 비교해 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의 삶을 똑바로 마주 보지 않을 것이다."(190)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깊게 읽었다면, 그것이 명상인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나중에 생각해 보기 위해 다만 다소의 말들을 가져가고 또 약간의 생각을 모았을 뿐이라면, 그것은 명상이 아니다."(181)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곧 죽음이며, 그러면 당신은 살고 있는 것"이라는 위의 설명을 옮겨 놓은 것은, 그것이 절실하고, 절실한 것이라면 혹 이해의 기회가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좀 종교적이었다면, 아니 그게 아니고 종교의 편에 섰다면, 찾는 사람이 더 많은 책이 되었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용감하게, 그리고 아주 쉽게 "종교적인 마음은 종교를 믿는 마음과 전혀 다른 것이다. 당신은 종교적이지 못하면서도 힌두교도나 회교도, 기독교도나 불교도일 수 있다. 종교적인 마음은 전혀 무엇인가를 구하지 않으며 진리를 체험할 수도 없다."(187)고 했습니다.

 

또 "더 이상 애쓸 수 없는 그런 마음의 상태가 종교적인 마음이며, 그런 상태 속에서 당신은 진리, 실제, 은총, 신, 아름다움 그리고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것"(191)이라고 하고, '아멘이나 옴'을 무한정 되풀이 외우는 것은 "코카콜라"를 무한정 되풀이 외우는 것과 같다고 해서 민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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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의 초월'(113~122) 중에서.

2. 118쪽 아래에서 3행 '그래야만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당 자신을 볼 수 있으며'에서 '당' 삭제. 141쪽 아래에서 7행 '어느 날 아침 강당에 올라가'에서 '강당'은 '강단'. 155쪽 2행 '우리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에서 '말로서가'는 '말로써가'일 것임.

3. 이 책에는 '아름다움'에 관한 설명이 많이 들어 있지만 그 설명들은 일관된 것이 분명합니다.

4. 이 책에는 '사랑'에 관한 설명이 많이 들어 있지만 그 설명들은 일관된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