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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김영승 시집 『반성』

by 답설재 2014. 12. 24.

김영승 시집 『반성

민음사, 2012

 

 

 

 

 

 

이 시집에는 '반성'만 들어 있습니다. 온통 '반성'뿐입니다. 시의 제목이 다 '반성'이고 일련번호만 다릅니다.

 

 

반성 39

 

 

오랜만에 아내를 만나 함께 자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왔다.

아내는 갈비탕을 먹자고 했고

그래서 우리는 갈비탕을 한 그릇씩 먹었다.

버스 안에서 아내는

아아 배불러

그렇게 중얼거렸다.

너는 두 그릇 먹어서 그렇지

그러자 아내는 나를 막 때리면서 웃었다.

하얗게 눈을 흘기며

킥킥 웃었다.

 

 

 

재미있습니다. 아름답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편 한 편이 가슴이 아파오고 괜히 미안하게 됩니다. 내게 저 시인으로부터 삶이 곤고하다는 연락이 올 리가 없어 다행스럽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그것이 비겁한 것이 아닌가 싶어집니다.

 

 

반성 673

 

 

우리 식구를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

서럽다

 

어머니를 보면, 형을 보면

밍키를 보면

서럽다.

 

밖에서 보면

버스간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병원에서, 경찰서에서……

연기 피어오르는

 

동네 쓰레기통 옆에서.

 

 

 

 

반성 704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 보고

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는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세상 일들을 '반성'한 시를 읽으면 속이 후련하지만, 그런 '반성'은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나고 신물이 올라오니까 욕지거리를 퍼부은 이 시인의 시를 옮기게 되면 한두 편 옮겨서 될 일도 아니어서 그런지, 그런 시, 항의하는 시, 시위하듯 하는 시, 사실은 꾸중하는 시…… 그런 시들은 그냥 읽은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에 대한 '반성'은 자꾸 읽고 싶어졌고 그게 좋았습니다.

 

 

 

반성 83

 

 

예비군 편성 및 훈련 기피자 자수 기간이라고 쓴

자막이 화면에 나온다.

나는 훈련을 기피한 적이 없는데도

괜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무슨 잘못을 또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어제나 그저께의 일들을 생각해 본다.

나 같은 놈을 예비해 두어서 무얼 하겠다고

어김없이 예비군 통지서는 또 날아오는가.

후줄그레한 개구리옷을 입고

연탄불이나 갈고 있는 나 같은 놈을.

나는 문득 자수하고 싶다.

뭔가를 자수하고 싶다.

 

 

 

** 김영승**

1958년 인천에서 태어나 제물포고와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세계의 문학》에 「반성·序」 외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 『車에 실려가는 車』, 『취객의 꿈』, 『아름다운 폐인』, 『몸 하나의 사랑』, 『권태』,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등과 에세이집 『오늘 하루의 죽음』이 있다. 현대시작품상, 불교문예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의 날개에 소개된 시인의 모습입니다. 사실은 블로거 『BLUE & BLUE』를 운영하는 내 친구 블로거("언덕에서")의 소개로 이 시인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