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우노 일리루시 『지상에서의 마지막 동행』
박순실 옮김, 대원미디어, 1995
노부부의 가슴 짠한 사랑과 사별(死別)을 다룬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감독 진모영)가 개봉 15일 만에 관객 40만명을 넘어서며 일일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11일까지 총 관객 수는 42만118명. 290만 관객을 모은 역대 다큐 최고 흥행작 '워낭소리'보다 13일 일찍 '40만명 고지'에 올랐다.
…(중략)…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복고(復古)와 향수(鄕愁)라는 시대 코드를 멜로 형식에 담아 자연스럽게 젊은층도 호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사 진진 김난숙 대표는 "'저렇게만 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게 되는, 눈물 흘리면서도 행복한 영화"라고 했다.
신문기사입니다.* 그것도 이미 지난 주말의 신문이니까 이 영화와 관련하여 또 다른 기사가 많이 나왔습니다. 인터넷에는 제발 할머니를 찾아가지 말아달라는 호소까지 보였습니다.
핀란드 소설 『지상에서의 마지막 동행』이 생각납니다.
사랑 이야기입니다. 노년 부부의 사랑 이야기.
♣
토르는 정년퇴임을 하고 헬싱키 근교에 아파트를 사서 아내 안니와 함께 다정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자식이 없는 그들은 발코니에서 패튜니아, 베고니아를 가꾸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습니다.
외롭습니다.
그러면 그만이고, 나이가 들면 다 그런 거지만, 안니가 암에 걸려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소설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병원에서 그는 가장 두려워했던 말을 들었다. 아내는 죽어가고 있었다. 은퇴한 시립 취업국장 토르 헬란더는 집에 돌아가려고 시외버스에 올랐다.
헬싱키로부터 집까지는 거의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그는 버스 뒤쪽에 앉아 있었다. 모자를 벗어 무릎 위에 얹어놓은 그는 골똘히 생각할 때마다 하는 버릇대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마치 사탕을 빨아먹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토르는 사탕을 입에 넣은 적은 없었다.
그는 몸집이 작고 약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운전석의 백미러에 비친 그는 앞으로 빗은 백발이 귀 위에서 말려 올라간 모습이었고 볼은 불그스레한 빛을 띠었다. 건강해 보이는 혈색이었지만 사실은 모세혈관이 잘못돼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19~20)
둘이서 그렇게 지내다가 이러한 '최후 통첩'을 받게 되면 누구라도 이럴까, 이렇게 썰렁할까 싶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병이 들면, 다 그런 것인가 싶은 것입니다.
♣
토르에게는 아내 안니를 잃는다는 사실을 견뎌낼 힘이 없습니다. 마침 그는 나처럼 오랫동안 심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것을 핑계로 자신도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주입시킵니다. 함께 손을 잡고 죽자고, 죽음을 속여버리자고,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전에, 그리하여 그들의 사랑이 갈라지기 전에, 그들이 먼저 그 죽음을 속여버리자고.
수면제를 사 모으고, 아파트를 청소하고, 꽃을 장식하고, 필요한 편지와 유서를 씁니다. 토르는 확실한 이성과 의지로써 이 일들을 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자살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등의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끝납니다. 라디오를 켜놓고……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 또 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아침이 또 있을까?
내 사랑은 내 곁에
조용히 누워 있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또 있을까?
"그 노래군요."
"그 노래야."
"난 저 노래가 항상 좋았어요."
"좋은 노래지."
"누가 불렀더라?"
"생각이 안 나. 그런데 안니…."
"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아. 아직 다 못한 말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 다 말한 셈이에요."
"당신을 사랑해. 언제나 사랑했어."
"알아요, 여보. 나도 언제나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은 내게 단 하나, 오직 단 하나의 소중한 사람이었어요."
"당신이 고마워. 모든 일에 대해 말이지. 우리가 함께 지낸 모든 세월이 고마워.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못 찾겠어."
"다 이야기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너무 아름다운 얘기네요. 나도 고마워요. 모든 일에 다 감사해요. 여보, 우린 정말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어요. 이 순간에도 모든 게 다 끝난다고 믿기 어려워요. 가까이 오세요. 안아줘요. 아주 가까이 있고 싶어. 당신 몸의 일부처럼. 그래요. 정말 좋아요."
…(중략)…
"다 먹어야 하나요?"
"적어도 반은 먹어야 해. 물하고 함께 조금씩 삼켜봐."
두 사람은 알약을 먹기 시작했다. 한 번에 네다섯 알씩 입에 넣고 물을 마셔 삼켰다. 이 순간 모든 것은 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쉬웠다. 그들은 죽음이나 내세, 또 서로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흰 알약과 그것을 삼키는 데만 모든 정신을 쏟았다.
그리고 나서 안니와 토르는 유리그릇을 탁자 위에 놓고 다시 누웠다. 서로 껴안고 마주보았다.
"빵처럼 먹지 말라구."
토르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얘기에요?"
"수면제 처방을 하면서 의사가 한 얘기야."
"그런 말을 했어요?"
"응, 기분 좋아?"
"좋아요. 당신은?"
"아주 좋아. 여보, 우리는 죽음을 속여 넘긴 거야."
"그래요, 이젠 자야겠어요. 잘 자요, 내 사랑."
"잘 자요. 내 사랑, 안니."
"라디오를 켜놓았군요."
"그냥 켜두지 뭐……."(172~176)
세월이 가면서 나이가 들게 되고 몸이 쇠잔해지고 병도 들고 사랑마저 떠나게 되는 건 얼마든지 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걸 다 경험해보고 되돌아온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소외, 단절, 그리고 두려움, 고립감, 고독, 절망 같은 것들도 아직은 추상적으로 다가옵니다.
나이가 들어 하루하루 점점 더 거무튀튀해지고 쭈글쭈글해지는 몸 속에, 이 쓸쓸한 회한의 귀퉁이에, 의지나 신념, 욕망, 기대, 희망, 고집, 편견 같은 것과는 다른, '이게 사랑인가' 싶은 무엇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저 영화나 이 소설이 이야기해 주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다면 이승은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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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2014.12.13(토), A11, [독립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박스오피스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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