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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박홍순 『대논쟁』

by 답설재 2014. 12. 4.

박홍순 『히스토리아 대논쟁』(서해문집, 2009)

 

 

 

『 히스토리아 대논쟁 04 칸트vs피터 싱어의 인간과 동물 논쟁, 도킨스vs르원틴의 사회생물학 논쟁 』

 

 

 

 

 

"며칠간 뭘 읽었습니까?"

그 대답으로 적습니다.

 

자그마한 책에 큰 제목이 붙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날개에 "논쟁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라는 '선언'이 보였고, "비판적 사고, 논리적 사고, 창의적 사고의 발전을 이루는 데 활발한 토론과 논쟁만큼 빠르고 바른 길은 없다"는 설명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성격 탓이겠지요, 누가 "거창한 책을 읽고 있군요!" 할까봐 책 제목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읽었습니다.

 

'히스토리아 대논쟁'!

다섯 권 중 한 권으로, 칸트 vs 피터 싱어의 인간과 동물 논쟁, 도킨스 vs 르원틴의 사회생물학 논쟁 등 두 가지가 실렸습니다.

 

 

 

 

뒤표지에 잘 요약되어 있었습니다.

 

<칸트 vs 피터 싱어의 인간과 동물 논쟁>

 

"인간은 수백만 년에 이르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1세기 사회를 한번 보십시오. 제가 살던 시대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이성'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지요. 이렇듯 이성을 발판 삼아 새로운 사회를 이루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입니다." _칸트

 

"인간은 그저 한 종의 동물입니다. 영장류 세계의 히피족이라고 불리는 보노보를 보세요. 자신들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들과 우리, 동물과 인간의 이익을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_피터 싱어

 

<도킨스 vs 르원틴의 사회생물학 논쟁>

 

"우리는 유전자의 생존 기계입니다. 삶의 모든 과정은 유전자가 만든 프로그램이지요. 인간은 '인간은 유전자를 존속시키는 데 이롭다.'는 생각이 들면 행동할 뿐입니다.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바란다고요? 미안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바로 당신의 '이기적 유전자' 때문에 말입니다." _도킨스

 

"인간은 결코 유전자의 노예가 아닙니다. 인간의 길고 긴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고 유전자 하나로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환원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다양한 특징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발현됩니다.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요." _ 르원틴

 

 

 

"맞짱 논쟁의 향연"이라고 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이고, 이런 이론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보면 "격렬한 것"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가령 도킨스가 맞짱 토론을 한 상대는 다른 사람이었으면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주제도 변경되어야 하겠지만, 이왕이면 좀 쎈 논쟁이 벌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읽는 내내 공평하게 한다고 양팀을 함께 응원하는 야구나 축구 중계방송의 해설자가 생각났습니다.

 

그렇지만 등장인물들이 한 말은 모두 지은이(박홍순)가 혼자 구성한 것이어서 의욕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겠지요. 지은이가 사회를 맡아서 진행하고, 진도를 나가기 위해 곧잘 다른 주제로 넘어가겠다고 했고, 등장 인물들이 좀 설설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교적 어려운 이론을 풀어서 설명(토론, 논쟁)해야 하는 한계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사회생물학 논쟁이다 보니 생물학, 특히 유전학과 관련된 용어들이 종종 튀어나와서 우리 독자들이 머리에 쥐가 좀 날 것 같습니다. 하하~ 그래도 두 분이 가급적 전문 용어를 자제하고 알기 쉬운 예를 들어가며 의견을 개진해주어서 고맙습니다.(153)

 

 

 

 

이 논쟁에 관한 키워드가 될 만한 단어들을 나열해 놓을까 하다가 공연히 아는 척하는 짓이 될까 싶어서 그만두기로 하고, 위의 역할극(인용) 중 르원틴의 대화에 나오는 '환원론'에 관한 부분을 예시로 옮겨놓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참 끔찍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고, 정치가들이 철학자의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할지 더욱 끔찍해지기 때문입니다.

 

환원주의는 복잡하고 추상적인 현상을 단순하거나 단일한 요소를 통해 설명하려는 경향을 말합니다. 과학에서는 직접적인 관찰이 어려운 개념이나 법칙을 실증적인 관찰이 가능한 몇 가지 명제로부터 설명하려는 것으로 나타났죠. 생물학에서는 생명 현상 등을 화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경험 과학에 기초해 해명하려고 했고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단순한 요소와 원리로 복잡한 현상을 규명할 수 있다는 신념인 것이죠. 그런 점에서 환원주의는 근대 과학의 특징인 기계론적 세계관과 닿아 있는 지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기초해 환원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데카르트를 꼽을 수 있겠는데요. 데카르트는 생물이 단순한 기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육체의 동작과 생물학적 기능이 어떻게 기계적 조작으로 환원되는가를 "우리는 시계, 인공폭포, 도정기(搗精機), 기타 유사한 기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비록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각종 방법으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나는 장인(匠人)이 만든 기계와 자연만이 만드는 각종 생물체 사이의 차이를 인정할 수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 시대에 시계 제조는 다른 자동 기계의 모델이 되었죠. 데카르트는 동물을 '치차(齒車)와 태엽으로 구성된 시계'에 비유하면서, 이를 더욱 확대해 인간에게도 비유했습니다. 그는 "나는 인간의 육체를 하나의 기계라고 생각한다. 병든 사람은 잘못 제조된 시계, 건강한 사람은 잘 제조된 시계에 비유될 수 있다."라고까지 말했죠.(148~149)

 

 

 

저 끔찍한 생각을 옮겨놓으며 한 가지 더 옮겨놓고 싶어졌습니다. 학자들은 설명하기를 좋아하지만, 우선 좋은 생각을 하도록 그 바탕을 마련해야 하고, 그건 바로 교육자들이 할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부모의 역할이야 이야기해둘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오랫동안 정신적인 영역을 근거로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려고 애써왔다.1 이성을 가진 존재,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과 동물의 질적 차이를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신은 인간적 특징으로, 육체는 동물적 특징으로 여겨지고 이성의 저수지인 정신은 고귀한 것, 육체는 욕망에 이끌리는 저열한 무엇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정신노동은 고귀한 것, 육체노동은 천한 것이라는 인식을 만들고 나아가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분리해 성적인 만족을 천한 것으로 여기게 했다. 이렇게 사람과 동물을 질적으로 구분하는 태도는 인간은 주체이고, 동물을 포함한 자연은 대상일 뿐이라는 등식 관계를 만들어냈다.

이런 생각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고 의식과 물질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적 관점이 자연을 착취의 대상쯤으로 여기게 했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인간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이용'을 넘어서 무차별적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정복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적 관점을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가 바로 '실천윤리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적 지평을 열어나가고 있는 피터 싱이다.(52~53)

 

"정신은 인간적 특징, 육체는 동물적 특징" → "정신은 고귀한 것, 육체는 저열한 무엇" → "정신노동은 고귀한 것, 육체노동은 천한 것"……

그렇다면 정신적인 인간과 육체적인 인간도 구분되고, 그러다보면 자연히 고귀한 인간과 저열한 인간도 구분되고, 그렇게 될 것 아닙니까? 무엇이든 자신이 시키는대로 해야 속이 시원한, 남들을 다 바보처럼 여길 고귀한 인간들!

 

더 우월한 인간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도 일부는 짐승이다?

좀 부려먹고 홀대해도 되는 인간이 있다? "에이, 짐승 같은 놈……" 그러면서. 하하하!(웃어도 웃는 게 아니죠.)

이렇게 쓰니까 웃기지만, 잘못된 생각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냉혈한 같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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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이 이성적인 인간을 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인간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기 위해 동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영혼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식물적인 영혼과 감각적이거나 동물적인 영혼, 이성적인 영혼이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가운데 이성적 영혼은 인간에게만 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서양철학자들은 그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데카르트는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조차 부정했다. 그는 이성적이지 않은 존재는 감각, 곧 쾌락이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생물학적 로봇 또는 의식적인 기계장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는 동물은 이성적인 능력을 갖춘 인간과 구별될 수밖에 없으며,당연히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부터 제외된다는 것이다.(이 책 56쪽에서 옮김)......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본, 실험실의 철망 안에서 돼지 심장을 달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실험실의 그 과학자를 내다보던 그 원숭이의 애처러운 얼굴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