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 시집 『멈춰 서서』
성혜경 옮김, 현대문학 2005
그림을 소재로 한 시를 골랐습니다.(22~23)
그리는 일
내가 그림을 생각해냈다 하여 그림이 나인 것은 아니다.
그림이 내 손을 빌렸다 하여 내가 그림인 것은 아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어느새 그림이 내게 그리게 하고 있다. 다시금 내가 그림을 그리지만,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또 그림이 내게 그리게 하고 있다.
나와 그림 사이에, 무언가가 왔다갔다하는 듯하다. 내가 의식하여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반대로 그림에게 맡긴 채로 그려버리면, 그 무언가가 터트려지지 않게 된다.
작품이 불가사의한 힘으로 가득 차 보이는 것은, 대개 나와 그림이 겨루었던 것이다. 이 텐션*과 밸런스의 무언가가 나를 화가이게끔 한다.
긴장감으로 단숨에 읽은 시집입니다. 그 긴장감이 재미를 느끼게 했습니다.
여느 시집을 읽을 때처럼 '시인이 쓴 시를 읽는다'고 생각하려 해도 금새 '화가니까 이런 시를 썼구나!' 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림을 그릴 때는 이렇게 하는구나!' 싶었고, 그림을 그리는 그 옆에 서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재미나 호기심은 그 긴장감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의 시는 또 화가, 미술가, 예술가의 '눈길'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 눈길은 사물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 사물과의 치열한 다툼, 화해, 갈등, 긴장, 관조 같은 걸 느끼게 했습니다.
"본다"는 것은, 사물과의 '대화(對話)'가 일어나는 양의적(兩義的)** 사유로 발전시켜 간 길, 그 과정을 짐작하게 했습니다.
그걸 흥미롭게,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시를 한 편 골랐습니다.(36~37)
카페에서 1
사람들로 북적이는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내 맞은편 자리에 아프리카인인 듯한 몸집 큰 흑인 할머니가 앉는다. 그녀는 말을 못하는지 갸르송에게 내 커피를 손으로 가리켰다. 잠시 후 커피가 나오자, 그것을 마시며 담배를 꺼낸다. 그러나 그건 마지막 남은 한 개비로 그나마 부러져 있다. 무심코 바라보고 있던 나는, 내 담배를 그녀에게 권하며 성냥으로 불을 붙여주었다. 할머니는 눈인사를 하고 맛있게 담배를 피우면서 미소를 짓는다. 부드러운 마주봄이 이어졌다.
어느덧 나의 시선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저 멀리 아프리카의 초원으로 향한다. 어쩌면 그녀의 시선 또한 나의 어깨 너머 먼 아시아의 어딘가로 향한 것이었을까? 서로가 보고 있는 시공時空의 폭 안에 둘은 있었던 것처럼 생각된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아득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은 느낌이다. 손자인 듯한 소년이 와서, 할머니를 손짓했다.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고는 천천히 카페를 나갔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만 모르고 있었는가 싶을 지경이긴 하지만, 올해 그는 베르사유궁 특별전 초대작가가 되었고, 그 작품 중 하나의 사진이 『현대문학』 7월호 표지에 실렸습니다. 다음은 그때의 '표지화가의 말'입니다.
내 발상은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모순된다는 겁니다. 존재는 모순이지, 존재는 존재가 아니에요. 존재는 관계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타자는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이 아니고 '대화' 혹은 '소통'의 상대인 것입니다. 내게 '관계론'은 있지만, '존재론'은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마르틴 부버처럼, "너와 나"를 말할 때, 이 둘의 소통을 의미하는 '와'가 중요한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는, '나'와 '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통' 자체가 중요한 것이에요. '소통' 안에 너와 내가 있고, 소통이라는 것 때문에 양쪽이 있는 거예요.
이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짐작할 수 있는 시 중에서 명징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시를 골라봤습니다.(72~73)
보이는 것
일본 여관의 휑그렁한 회반죽 벽의 다다미 방. 그 한 모퉁이에 자그만 꽃 한 송이가 환하게 꽂혀 있다. 그것뿐이건만 왠지 방보다 크고 아련하게 여백이 퍼진다. 이 공간에 젖어들면 고요히 보이는 것이 있어, 문득 사람은 투명해진다.
생각이나 생활이 단조롭다고 느껴질 때 다시 읽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가 일관성 있게 생각하는 것, 혹은 그의 사유의 방향, 그 흐름을 따라가는 '길'이 신선하고, 재미있고, 긴장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한결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해도 그 단조로움을 피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걸어도 걸어도 아무도 보이지 않고
풀숲에 달내음이 미칠 것 같다
까닭도 없이 가슴은 터질 것 같아
들길에 멈춰 서서 눈을 감는다
(「달밤」의 부분)
그는 "멈춰 서서" 생각하고, 느끼고, 썼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그를 따라가는 길이 재미있고, 굳이 멈춰 서지 않고 따라가는데도 무언가 모를 긴장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습니다.(132~133)
사랑
나는 그녀가 좋고
그녀는 내가 좋고
테이블을 마주하고
미소 지으며 식사를 한다.
포크와 나이프를 울리며
식사는 무아지경이 된다.
나는 그녀를 비우고
그녀는 나를 비운다***
식사가 끝났을 때 그녀와 나는
자리가 바뀌어 있다.
그녀는 그녀가 좋고
나는 내가 좋다.
그나마 시인이 있어서 괜찮은 세상입니다.
.......................................................
* tension 긴장, 갈등 : 1. [불] 팽팽하게 치기[늘이기]; 신장, 인장(引張) muscular tension 근(筋)장력.2. [불][가] (정신적·감정적인) 긴장, 불안 a headache caused by tension 긴장에서 오는 두통.3. (종종 tensions) (정치적·사회적인) 긴장 관계[상태] lessen[reduce] international tension 국제간의 긴장을 완화하다.4. [불] [역학] 장력(張力); (기체의) 팽창력, 압력; [전기] 전력, 전압 surface tension 표면 장력.5. [기계] 인장 장치... DAUM 사전에서 찾았습니다. 이 시를 번역한 이는 바로 다음에 나오는 '밸런스'라는 단어와 균형(밸런스)을 맞추기 위해 이 단어도 외래어로 취급하여 번역한 것으로 짐작됩니다.(파란편지)
** 심은록 엮음, 『양의의 예술-이우환과의 대화 그리고 산책』현대문학(2014).
*** 여기에는 마침표가 보이지 않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파란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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