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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재미있는 각주(脚註)

by 답설재 2015. 3. 12.

생각이 좀 삐딱한 것인지, 각주는, 믿어 달라고 하고 싶거나 잘난 척하고 싶거나 과시하고 싶거나 남의 것을 대놓고 슬쩍하거나1 할 때 써먹는 것이어서 그 중 가령 잘난 척할 때는 한 페이지 전체를 각주로 채워버릴 수도 있고, 남의 것을 좀 슬쩍하고 싶을 때는 표가 나지 않으면 굳이 각주를 달지 않고 '이건 너무 명백해서 안 되겠다' 싶으면 어쩔 수 없이 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요즘은 각주 다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읽기도 성가실 뿐 아니라 사실은 꼴 보기 싫을 때가 많다는 생각으로 "앞으로는 가능한 한 각주를 달지 말고 굳이 달고 싶으면 후주(後註, 尾註)로 달아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짐작이나 하고 있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구나 싶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소설가 임승훈2의 단편소설 「골키퍼 에릭 홀테의 고양이가 죽은 다음 날」에 붙은 각주들이 재미있어서 그 소설 중에서 옮기기가 좋은 부분을 골라봤습니다.3

 

 

골대 앞의 에릭 홀테는 지난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의 고양이 고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고다는 에릭 홀테가 네덜란드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 때부터 키웠던 잿빛 고양이이다. 고다의 나이는 짐작할 수 없이 많았으며,9) 할머니처럼 밭은 숨을 내쉬며 울었다.

홀테는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의 부모는 홀테가 세 살 때 교통사고로 죽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부유했고, 부모님의 유산 또한 넉넉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어린아이와 어울리는 법을 모르는 여자였다. 그녀는 일찌감치 남편을 여의고 홀테의 아버지를 혼자 키웠다. 원래 고지식했던 그녀는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지나치게 엄격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으로 변해갔다. 홀테가 맡겨진 시기의 그녀는 노인 특유의 예민함이 겹쳐 상대하기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했고, 앓는 소리를 냈으며, 소리를 질렀다. 때때로 벨트로 홀테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홀테는 할머니가 무서워 집 안에서 고양이처럼 걸어 다녔다. 그리고 그의 뒤를 잿빛 고양이가 따라다녔다. 홀테는 책을 읽다 문득 고다를 안고 슬픔을 속삭였고, 고다는 홀테의 귀를 핥아주었다. 남자다운 손자를 원했던 할머니는 언제나 집에서 고양이를 안고 책을 읽는 그를 인근 유소년 축구 클럽에 가입시켰다.

그렇지만 홀테는 남과 어울리는 법을 모르는 소년이었다. 그는 점차 누군가와 뛰어다니며 공을 주고받는 것보다 골대 앞에 혼자 서 있는 게 편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들은 누구나 골키퍼를 하지 않으려 했기에10) 그가 골키퍼 포지션을 독점하는 것은 쉬웠다.

에릭 홀테가 뛰어난 골키퍼라는 것은 금방 증명됐다. 그가 골대를 지키고 있는 팀은 언제나 안심하고 수비수까지 공격에 참여하곤 했다. 몇 가지 우연이 하나의 인생을 만들 듯 그 역시 몇 가지 무심한 선택들이 그의 숨겨진 재능을 일깨운 것이다. 그는 열여섯 살에 명문 팀의 유소년 아카데미에 입단했고, 스무 살에 로테르담에 있는 엑셀시오르 2군에서 데뷔했다.

그의 집은 브뤼셀이었기 때문에 그는 로테르담에 숙소를 잡았다. 그가 짐을 싸서 로테르담으로 이사하는 날, 그의 할머니는 유독 잔소리가 심했다. 그는 이 까다로운 노인네에게서 벗어났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제 정말 자신만의 인생을 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에게도 친구가 생길지도 몰랐다.

물론 그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홀테의 할머니는 잿빛 고양이 고다를 데리고 매주 두 번씩 두 시간 30분 거리를 왕복하며 그를 보러 왔다. 그녀는 여전히 소리를 질렀고 끊임없이 잔소리하면서 그의 방을 치우고 빨래를 했다. 때때로 그가 아끼는 물건을 버렸다. 그러면 홀테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다의 배 아래애 한쪽 손을 댄 채 축구 전술 책을 읽었다.11)

6년 후 홀테는 영국으로 가게 됐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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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심지어 홀테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린 시절 고다와 똑같이 생긴 고양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10) 모든 소년은 세상의 모든 공격수가 되고 싶다. 펠레도 마라도나도 호나우도도 앙리도 공격수이지 않은가. 축구란 단 한 골을 위한 축제, 골키퍼란 야곱의 염소처럼 신성한 제물이다. 그러므로 소년들은 저 깊은 곳, 심연에 가까운 곳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골키퍼 자리에 있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골키퍼가 어쩌면 우리의 본질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11) 네덜란드의 지적인 남자들은 모두 축구 전술을 공부한다. 만약 축구 전술이 지성이 아니라면 무엇을 지성으로 불러야 할까.

 

 

"뭐 별로 재미있는 줄 모르겠는데?" 한다면 직접 그 소설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고 이 세 개의 각주보다 더 재미있는 각주도 여러 개라고만 하겠습니다.

 

여담(餘談)입니다.

"골대 앞의 에릭 홀테는 지난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의 고양이 고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그 결과입니다.

이 경기는 시칠리아를 연고로 하는 유니온 스포르티바 시타 디 팔레르모(US팔레르모, 팔레르모)와 SSC 나폴리와의 경기였는데, 지금 나폴리의 아르헨티나 출신 스물세 살의 공격수 훌리오 그룬도바가 페널티킥을 준비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에릭 홀테도 여간한 골키퍼가 아니지만 가우초 훌리오 그룬도바도 여간한 공격수가 아닙니다. '가우초'가 뭔가 하면 다음과 같은 각주4가 붙어 있습니다.

 

4) 아르헨티나의 시인 알라바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도 가우초를 이길 수 없지. 그들의 두꺼운 다리는 아르헨티나의 허리를 꽉 조이거든." 일을 시키기 위해 말과 당나귀를 교배해 노새를 만들 듯, 스페인 사람들은 소를 몰게 하기 위해 스페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가우초를 만들었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자유와 싸웠다. 그들은 들소를 좇듯 미래를 쫓았다. 그들은 아르헨티나의 심장에서 태어났지만 어떤 자들은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 정말로 승부를 가르는 장면입니다. 숨 막히는 그 장면, 시(詩)처럼 절제된 표현으로 이어진 그 장면에서 몇 군데를 옮겼습니다.

 

홀테는 젊은 아르헨티나인을 응시했다. 마라도나처럼 그도 가우초였다. 다리를 단단하게 땅에 박고 서 있는 모습이 고대의 기둥처럼 보였다. 그에게 현재란 가장 하찮은 시간처럼 보였다. 그는 온몸으로 미래를 불러오고 있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홀테는 자신이 수치스러워졌다.

홀테는 늘 자신은 골키퍼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라운드 위에 있을 때면 어두운 골대 아래에 숨어 사는 괴물처럼, 광휘와 영광을 흩뿌리며 돌진하는 선수들을 훔쳐봤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전사들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사제들이었다.

…(중략)…

홀테는 날아올랐다. 그의 표정은 절망적이었지만 그의 주먹은 정확하고 예리했다. 그룬도바의 슛은 홀테의 펀칭에 맞아 골대의 반대편으로 튕겼다. 마초니는 울 듯한 표정으로 공을 향해 뛰어갔다. 마초니의 패스는 빠르게 로시에게 갔고, 다시 라니에리에게, 달리마에게, 콘핀더스리아에게 갔다. 공은 마치 음탕한 여자처럼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그리고 경기는 끝났다. 마초니는 울었다. 토하면서 울었다. 그의 벤츠를 부수고 있는 동료들에게 울트라들은 전화했다. 이봐 그만해. 우리가 이겼어. 마초니를 용서해주자고.

홀테는 녹색의 잔디를 밟고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돌아왔다. 그는 살아났다. 그를 향하던 총구는 처참하게 망가졌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룬도바는 잔디 위에 드러누웠다. 자신의 꿈이 또다시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팀에 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구의 사나이들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략)…

 

 

"골대 앞의 에릭 홀테는 지난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의 고양이 고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테는 이겼습니다. 소설은 이렇게 끝납니다.5

 

홀테는 다음 해에 사망했다. 그는 술에 취해 운전하다 교회를 들이받았다. 홀테는 탄환처럼 앞 유리를 뚫고 나가 십자가 옆에 처박혔다. 그는 할머니 옆에 묻혔다. 린스트라6는 홀테의 집에서 고다7의 유골함을 가져와 홀테의 무덤 옆에 묻었다. 린스트라는 매년 두 번, 홀테와 그의 할머니와 할머니라 불렸던 고양이의 무덤을 찾아서 술을 마셨는데, 그것이야말로 홀테가 가장 바라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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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속된 말로)(사람이나 짐승이 남의 것을) 몰래 훔치다.
2. 1982년 서울 출생. 숭실대 문창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재학 중. 2011년 『현대문학』 등단(『현대문학』2015.2월호, 117쪽)
3.『현대문학』2015년 2월호
4. 이 소설의 각주 1)
5. 116~117쪽
6. 한때 그의 아내
7. 고양이. 할머니의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