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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파트릭 모디아노 『도라 브루더』

by 답설재 2015. 3. 25.

파트릭 모디아노『도라 브루더 Dora Bruder』

김운비 옮김. 문학동네. 2007.

 

 

 

 

 

 

 

'노벨상 특수'와 무관하게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세계는 꾸준한 화두였다. 서른 편을 훨씬 웃도는 작품들 속에서 작가는 한결같다. 서사는 언뜻 느리고 느슨해 보이지만 섬세하고 탄탄하다. 비슷한 인물들이 비슷한 행동을 통해 비슷한 사건을 일으키고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그래서 플롯이 빤해 보이지만 의외로 이야기의 전개는 갈수록 흥미진진하다. 문체는 깔끔하면서도 서정적이며,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유려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안을 다루면서도 객관적인 시선과 냉정한 어투를 유지한다. 모디아노의 작품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동일한 테마와 모티프들은 오히려 때마다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이토록 일관되고 절제된 글쓰기를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모디아노는 시대의 역사에 가려진 개인의 기억을 집요하게 좇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68년 등단 이후 쉬지 않고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그에게는 몇몇 고정된 시대적 지표가 있다. 그중 하나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이다. …(후략)…1

 

어떤 작가의 어떤 책들을 가지고 이렇게 표현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어떤 작품을 읽을까 싶었는데,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글도 보였습니다.

 

……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은 그의 가장 아름다운 소설 『도라 브루더』에서 재확인된다. 『도라 브루더』는 1965년 시점의 화자가 1941년 12월 31일자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는 것으로 사건이 시작된다. 유대인 가족인 브루더가 가출한 딸을 찾는 광고를 보고 화자는 그 소녀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에 골몰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떠난 뒷자리에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들이다. 거의 이름도 없는 존재들, 어떤 미지의 상태, 미지의 침묵하는 덩어리. "그들의 삶은 그렇다. 점령 시절에 박해를 피해 몸을 피한 것으로 짐작되는 소녀의 흔적을 찾아 각종 기관의 서류를 뒤지며 파리 외곽을 헤매면서 간간이 화자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의 삶도 그 침묵하는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에서 자주 나타나는 실종, 추적의 테마는 결국 그 침묵의 덩어리를 깨는 일이다.2

 

다음과 같은 신문기사를 보고 그 여성을 찾게 됩니다.

 

파리

여자아이를 찾습니다. 도라 브루더, 15세, 1미터 55센티미터, 갸름한 얼굴, 회갈색 눈, 회색 산책용 외투, 자주색 스웨터, 감청색 치마와 모자, 밤색 운동화. 모든 정보는 브루더 부부에게로 연락 바람. 오르나노 대로 41번지. 파리.

― 7쪽(파리 수아르 1941.12.31. 기사)

 

"문체는 깔끔하면서도 서정적이며,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유려하다."

원서는 아니어도 그 표현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자주 보였습니다.

 

밤 아홉 시가 지나면 거리는 텅 비었다. 나는 아직도 생플롱 지하철역 입구의 불빛을 기억한다. 또 거의 맞은편의 '오르나노 43' 영화관 입구의 불빛도 기억한다. 영화관 곁에 있는 41번지 건물은 한 번도 내 주의를 끌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여러 달, 여러 해 동안 나는 그 앞으로 지나다녔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모든 정보는 브루더 부부에게로 연락 바람. 오르나노 대로 41번지, 파리.(10)

 

그 일대를 얼마간 걸었을 때 날짜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일요일의 슬픔이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기숙사로 돌아와야 했던 일요일 저녁, 그녀는 나시옹 역에서 지하철을 내렸다. 기숙사 문을 넘어 안뜰로 들어가는 순간을 늦추려고 그녀는 발길 가는 대로 주변을 배회했을 것이다. 날이 저물어왔다. 생망데 대로는 가로수들이 많은 조용한 거리다. 어딘가 공터 같은 데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픽퓌스 지하철역의 낡은 출구 앞을 지나간다. 도라는 간혹 이 출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오른편으로 꺾어들면 픽퓌스 대로, 이 거리는 생망데 대로보다 썰렁하고 황량하다. 나무들도 없다. 거기 존재하는 것은 일요일 저녁 돌아오는 길의 고독감뿐이었을 것이다.(147~148)

 

저 '노벨문학상 특집' 기사를 읽을 때는 별로 생각하지 못했는데, 나치의 경찰에게 끌려가 영영 사라져버린 도라 브루더를 찾아간 기록이었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 이 작품 『도라 브루더』에서 그는 나치 강점기의 우울한 과거로부터 한 소녀를 불러내어 현재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서의 과거를 복원해내고 있다.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단문들, 전쟁의 폭력을 무력하게 하는 청춘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잔한 묘사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여운을 선사한다.3

 

언젠가 혹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록들도 보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유대인 문제 경찰국장 슈베블랑 씨는 그가 '보조 경찰'이라 부르는 대여섯 명의 보좌들을 대동하고 수용소를 방문했다. (……) 책상의 좌우 언저리에 물건 받는 그릇을 두 개 올려놓았다. 한쪽은 현찰, 다른 한쪽은 귀금속류. 곧 이송될 억류자들은 한 줄로 서서 치밀하고 모욕스럽게 수색대원들 앞으로 지나갔다. 다반사로 얻어터지고, 바지를 내려야 했고, 군홧발 강타에 곁들여진 욕설 공세를 치러야 했다. "새끼! 아직도 경찰 피를 빨아먹겠다는 거야 뭐얏!" 안주머니, 바깥주머니, 모두 수색 시간을 단축한다는 이유로 난폭하게 찢겨나갔다. 여자들의 수색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다. 은밀한 곳은 남아 있지 않았다.

(……) 그들은 주머니에서 값비싼 반지 따위를 꺼내들고 떠벌리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봐. 이거 가짜가 아니라구!" 또는 오백 프랑 천 프랑짜리 지폐 다발을 쓱 꺼내들며 "아, 이걸 잊었었군!" …… 수색작업은 막사들 구석의 매트리스, 이불, 베개까지도 다 찢어놓았다. 한데, 유대인 문제 경찰국에 의해 자행된 그 모든 수색 작업들에 관한, 어떤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다.45

 

1942년 6월 20일―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어제 가방을 받았소. 정말 고마워. 모르긴 해도 출발이 급박해지는 것 같아 두렵구려. 오늘 나는 머리를 밀어야 한다오. 이송자들은 오늘 저녁부터 특별 수감동에 갇혀서 밀착 감시를 받을 것 같소. 변소 갈 때도 헌병이 따라붙겠지. 불길한 기운이 수용소 전체를 덮고 있소. (……) 소식이 끊기더라도 미친 사람처럼 아무 데나 달려가지 말고, 인내와 믿음으로 기다려요. 나를 믿어주오. 어머니에게는 내가 이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해요. 전에도 말했지만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경우야 흔히 보아왔잖소. 슬픈 일은 펜과 헤어져야 하고 종이 한쪽 가질 권리도 없다는 거요. 가소로운 생각이 드는구려. 칼도 금지되고 한낱 정어리 깡통따개조차 가질 수가 없다니! 허세 부리는 게 아니라 이런 환경은 너무 내 취향이 아냐! 출발자 명단에는 환자와 불구자도 무척 많다오. Rd가 생각나는구려. 그가 결정적으로 은신처를 찾았기를. 자크 도말의 집에 내 잡동사니 물건들이 꽤 남아 있소. 우리 집에서 지금 당장에 책들을 꺼내버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아무튼 가족들 처사에 맡기겠소. 여행길에 날씨가 좋기를. 잊지 말고 어머니 노인수당을 살펴보도록. UGIF에서 원조받을 길이 있는가도 알아보고. 당신과 자클린이 그만 화해하기를 바라오. 그녀는 별나기는 해도 알고 보면 멋진 여자요. 날이 밝아오는구려. 화창한 하루가 되려는 것 같소. 내 일상 메모들이 당신 손에 들어갔는지, 출발 전에 내가 또 답장을 받을 수 있을는지 알 수 없구려. 어머니와 당신, 마르트, 모두 보고 싶소. 그리고 내 자유를 지키도록 애정을 가지고 도와줬던 다른 모든 친구들도. '겨울을 잘 나게' 해준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오. 이 편지는 여기서 그만 중단해야겠소. 가방을 챙겨야지. 다음에 또 쓰겠소. 만년필과 시계는 어머니가 뭐라 하든 마르트에게, 또 내가 계속해서 더 쓰지 못할 경우에는 이 짧은 기록도 마르트에게 남긴다. 사랑하는 어머니, 너무 사랑하는 당신과 마르트, 뜨거운 포옹을 보내오. 용기를 잃지 말도록! 그럼 다음에. 일곱 시가 되었소.(142~145)

 

 

 

 

기록은 중요합니다. 이 소설은 기록을 찾아가는 과정을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기록입니다.

 

겉표지에 '여(女)'라고 써진 투렐의 1942년 수감자 명부는 오늘까지 남아 있다. 그녀들은 투렐에 도착한 순으로 거기에 이름이 올라갔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거나 공산주의 추종자라는 이유로 체포된 여자들, 그리고 1942년 8월까지는 독일군 법령을 따르지 않은 유대인 여자들이 주로 명부를 채웠다. 저녁 여덟 시 이후 외출 금지령을 어긴 여자, 노란 별을 달지 않은 여자, 점령 분기선을 넘어 자유지대로 도망치려 했던 여자, 전화 사용 금지령을 무시하고 전화를 건 여자, 소유가 금지된 자전거나 라디오를 숨겨놓았던 여자…… 1942년 6월 19일자 기록을 보면, (……) (127)

 

우리는 기록이나 보관의 중요성을 인정하는지 의문입니다. 증거를 대라면 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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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광진,「길을 잃지 않으려면 파트릭 모디아노를 읽어보세요」,『현대문학』2014.11월호, 노벨문학상 특집-파트릭 모디아노 Patrick Modiano-작품세계(210~217)의 첫 부분 '나는 기억하지 않는 것을 기억한다'의 첫 부분.

2. 이재룡「수첩, 전화번호부, 그리고 소설」『현대문학』2014.11월호, 노벨문학상 특집-파트릭 모디아노 Patrick Modiano-작품세계(218~225) 중에서(221~222).

3. 앞표지 날개의 저자 소개에서.

4. 이상은 1943년 11월에 피티비에 세무서의 한 관리가 써 올린 행정 보고서 내용이다.(원주)

5. 77~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