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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by 답설재 2015. 4. 21.

헤르만 헤세『수레바퀴 아래서

김이섭 옮김, 민음사 2009 신장판 47쇄

 

 

 

 

 

 

 

어느 월간지에서 "헤르만 헤세의 성장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소설이 성장 소설1이었던가?'

그래서 다시 읽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조급한 마음이 일긴 하지만 문장이나 흐름의 편안함도 느꼈습니다.

 

'성장 소설'이라는 말을 "특별히 넓은 뜻으로" 혹은 "느슨하게 썼다"고 하거나, "대충 썼다"고 한다면 몰라도 아무래도 잘못된 해석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또 남들이 그렇게 하면 대충 받아들이는 경향이 없지 않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물론 "그쪽으로는 내가 영향력 있는 인물이지만 나는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할 사람도 수두룩하겠지만…….

 

 

 

"마울브론 신학교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하여 씌어진 『수레바퀴 아래서』는 자신을 짓누르는 가정과 학교의 종교적 전통, 고루하고 위선적인 권위에 맞서 싸우는 어린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의 자서전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그의 분신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젊은이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한스처럼 <수레바퀴 아래서> 힘든 삶의 여정을 밟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성장 소설'일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결말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한스는 라틴어 학교에 들어가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목사의 길을 걷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하지만, 규칙과 인습에 얽매인 그곳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걸려 퇴출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학교 밖으로 나가고 있는 청소년이 한 해에 2만 몇천 명이랍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공장의 견습공으로 새로운 삶을 열어보려고 하지만, 결국은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맙니다.

한스가 그 어디든 잘 적응했다면 이 소설은 당연히 성장 소설이 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청소년이 읽을 책이라기보다는 어른들, 특히 부모나 교육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침이 되어야 할 '필독서'이고, 이미 부모 혹은 교육자가 된 사람들이 읽고 반성해야 할 '지침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잘못 가르치면 이렇게 한 인간을 망치게 된다!"

"진로지도를 잘못하면 이렇게 된다!"

 

이와 같은, 가슴아픈 이야기, 피해를 입은 사례를 하나 들고 싶지만 내가 헤르만 헤세도 아니므로 끝까지 가슴에 묻고 말겠습니다.

 

 

 

한스 기벤라트는 이 작은 마을이 힘겨운 경쟁에 내보내기로 한 유일한 후보자였다. 그 명예는 대단했다. 그렇다고 그가 이러한 명예를 거저 얻은 것은 아니었다 매일 4시까지 계속되는 학교 수업 이외에도 교장 선생이 따로 가르치는 그리스어 수업이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6시에는 마을 목사님이 친절하게도 라틴어와 종교의 복습 강의를 해주었다. 또한 일 주일에 두 번씩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도 수학 교사로부터 한 시간에 걸쳐 지도를 받았다.(12)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화되어버린 '사교육'이고, '영재교육'이라는 이름의 '특별지도', '선행학습'입니다.

 

어느새 한스는 또다시 숙제 더미에 깔려 있었다. 어느 때는 밤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이를 악물며 과제물을 풀었다. 아버지 기벤라트는 열심히 공부하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지켜보았다. 자신들의 줄기에서 뻗어난 가지가 자신들이 막연하게 존경해 마지 않던 높은 영역에까지 치솟기를 바라는 속인들의 이상이 아버지의 우둔한 머릿속에서도 어렴풋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77)

 

이것은 부모의 지나친 기대의 모습입니다.

 

 

 

한스는 여기서 보냈던 시간들을 다시 회상해 보았다. 예전에 그는 반나절, 혹은 하루 온종일 수영도 하고, 잠수도 하고, 노도 젓고, 낚시도 했다. 아, 낚시질! 이제 그는 낚시하는 법조차 거의 잊어버렸다. 지난해에는 시험 준비 때문에 낚시질이 금지되었었다. 그래서 그는 쓰디쓴 눈물을 흘려야 했다. 낚시질! 그것은 오랜 학창 시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추억거리였다. 수양버들의 옅은 그늘 아래 물레방앗간의 둑에서 떨어지는 깊고도 잔잔한 물소리! 물 위에 어른거리는 불빛과 길게 늘어진 낚싯대의 잔잔한 흔들림, 그리고 미끼를 문 고기를 잡아당길 때의 흥분, 차갑게 꼬리를 흔들어대는 살이 오른 물고기를 손에 잡아들 때의 그 형용할 수 없는 기쁨!(16~17)

 

그 당시에는 모든 것들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훤씬 더 아름답고, 즐거웠으며, 활기가 넘쳐흘렀다. 벌써 오래 전부터 한스는 라틴어와 역사,그리스어와 시험, 신학교, 그리고 두통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동화책도 있었고, 도둑 이야기가 적힌 책도 있었다. 자그마한 정원에는 한스가 손수 매달아놓은 절구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이면 나숄트 집안의 현관 앞에 모여 리제의 모험담을 듣기도 했다 그때는 가리발디라고 불리던 이웃집의 늙은 할아버지 그로스요한을 오랫동안 강도 살인범이라고 생각함 꿈을 꾸기도 했다.

일 년 내내 한 달에 한 번꼴로 애타게 기다려지던 일들이 있었다. 풀을 말리는 일, 토끼풀을 베는 일, 첫 낚시질에 나서는 일, 가재를 잡는 일, 호프를 거둬들이는 일, 나무를 흔들어 자두를 따는 일, 불을 지펴 감자를 굽는 일, 그리고 곡식 타작을 시작하는 일 등이었다. 그 사이에도 틈틈이 즐거운 일요일과 축제일이 있었다.(185)

 

아이들은 왜 놀아야 하는지, 공부는 교과서만 가지고 하는 것이어야 하는지, 교과서에 들어 있는 것들보다 더 중요한 공부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가르쳐주는 장면도 있습니다.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들의 야비스러운 명예심이 연약한 어린 생명을 이처럼 무참하게 짓밟고 말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172~17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스가 왜 죽었는지 그 까닭을 아는 사람은, 예전에 어린 한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주곤 하던 구둣방 아저씨말고는 없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한스는 그저 "불운하여", 말하자면 "재수가 없어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장례식 날, '살인자' '죄인들'의 대화 장면입니다.

 

교장 선생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래요, 선생님. 저 아이는 훌륭하게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뛰어난 아이들이 도리어 불운을 맞게 된다는 건 정말이지 슬픈 일이지요!」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는 한스의 아버지, 쉬지 않고 흐느껴 우는 아나 할머니와 함께 무덤 가에 남아 있었다.

「참으로 가혹한 일입니다, 기벤라트 씨!」 그는 동정어린 얼굴로 말했다. 「저도 그 아이를 무척 좋아했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는 무척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어요. 그리고 일도 모두 잘 풀려나갔지요. 학교며 시험이며…… 그러다 갑자기 한꺼번에 불행이 닥쳐온 겁니다!」

구둣방 아저씨는 묘지 문을 나서는 프록코트의 신사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걸어가는 신사 양반들 말입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도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지요.」

「뭐라구요?」 기벤라트 씨는 흥분한 나머지 펄쩍 뛰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원, 세상에.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진정하세요, 기벤라트 씨. 전 그저 학교 선생들을 말한 것뿐이에요.」

「어쨰서요? 도대체 왜 그렇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나, 우리 모두 저 아이에게 소홀했던 점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진 않으세요?」(262~26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성장 소설'이라면 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장하다가 죽어가는 아이들은 당연히 죽어야 할 아이들이라고 여기는 것이라면……

덧붙이면 소설의 여러 곳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읽는 듯한 느낌에 빠지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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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 소설(成長小說) (문학) 주인공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정신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 소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 토마스 만의 [마(魔)의 산], 헤세의 [유리알 유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유의어 교양 소설(敎養小說), 교육 소설(敎育小說), 발전 소설(發展小說): 다음사전에서 옮김.

** 작품 소개 중에서(265~2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