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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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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공부법―사소한 것들에 대한 사유』

by 답설재 2015. 4. 26.

권용선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사소한 것들에 대한 사유』

(주) 역사비평사, 2014.

 

 

 

 

 

 

 

 

 

 

    <발췌>

 

    □ 프롤로그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 특히 어떤 내용인가의 문제보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가 벤야민에게는 항상 중요했다. 베껴 쓰기, 잠언적 글쓰기, 논문적 글쓰기, 그리고 인용 부호 없는 인용의 글쓰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글쓰기를 실험했다. 그것만이 시대를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에게 글쓰기는 유일한 삶의 출구였는지도 모른다. 출구란 이 삶의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그 무엇을 발견하는 것, 아니 발명하는 것이다.(30~31)

 

 

    Ⅰ. 도시, 배움의 장소들

 

  1. 학교 그리고 학교 바깥

 

  "오늘에야 비로소 나는 당시 선생님들 앞에서 모자를 벗어야 했던 의무가 왜 그렇게 싫었는지, 왜 그렇게 굴욕적이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제스처를 통해 나의 개인적 삶의 세력권 안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라는 요구가 내게는 무례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38)

 

  2. 베를린, 배움의 시작과 도시에 대한 기억

 

  3. 나폴리와 모스크바, 길 찾기와 길 잃기 사이에서 발견한 것들

 

  그는 낯선 도시에서는 '마치 숲에서 길을 잃듯이 헤매는 것은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65) (……) 그것은 단순히 우연의 힘에만 기댈 수 없는,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그곳이 도시라는 사실을 잊을 때까지, 마치 숲에서 길을 잃듯 도시를 헤매는 기술을 습득한 사람에게만 낯선 도시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하지만, 아주 잠깐 동안만―드러낸다.(66)

 

  벤야민은 모스크바 여행을 통해 자신이 떠나온 곳, 즉 베를린을 다시 발견했다. 그 결과 모스크바에 관한 에세이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를 알게 되기 전에 먼저 모스크바를 통해 베를린을 보는 법을 배운다."(91)

 

  4. 파리, 길을 잃어야 길이 보인다

 

  "(……) 파리는 미로라기보다는 차라리 수평갱도였다. 수백 개의 갱도와 함께 도시 전체에 남북으로 뚫린 지하철의 세계를 나의 끝없는 산보와 떼어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다."(96)

  한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은 그 도시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낡은 방법이 되어간다. 여행자에서 거류민으로 신분이 바뀌게 되면 '헤매기'는 일상적인 '산책'으로 옮아간다.(97)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19세기 파리로의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벤야민 스스로 창안해낸 여행안내서, 아니 한 장의 지도라고도 부를 수 있을 듯하다. (……) 그것은 철골 건축, 석판화, 파노라마, 철도, 거울, 사진과 같은 사물일 때도 있고, 생시몽, 푸리에, 마르크스, 보들레르, 도미에, 위고 등과 같은 인물일 때도 있으며, 인간학적 허무주의, 인식론과 진보 이론, 인간학적 유물론과 같은 철학적 방법론일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패션, 파리의 거리, 조명 방식들, 복제 기술, 코뮌, 파리의 몰락과 같이 동일한 층위에 배치할 수 없는 것들도 병렬적으로 놓여 있다.(113) (……) 이 퍼즐은 그것을 손에 쥐는 사람에 따라 매번 다른 형상을 만들어낸다. 벤야민은 이것을 '문학적 몽타주'라고 불렀다. "문학적 몽타주, 말로 할 건 하나도 없다. 그저 보여줄 뿐."(114)

 

 

    Ⅱ.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변신과 공생)

 

  1. 기억의 발견 : 프루스트로부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느 날 오후의 홍차 한 잔과 마들렌의 맛'이라는 단순한 계기와 사소한 사건으로 시작되지만, 내용이 전개될수록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한 시대의 풍속과 문화의 본질을 드러내며 거대한 이야기로 발전해 나간다. 프루스트는 이 한 편의 소설로 자신의 생을 풍부하게 살았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여러 차원을 두텁게 제시했다.(124)

  프루스트의 이야기가 '어느 날 오후의 홍차 한 잔과 마들렌의 맛'에 힘입어 시작되듯, 벤야민의 이야기는 "삶에 대한 통찰이 번개처럼 일종의 영감과도 같은 힘으로" 엄습했던 장소로 파리에서의 어느 날 오후를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125)

 

  "프루스트가 자기의 인생 이야기를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역사 기술은 깨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른 것은 일절 다뤄서는 안 된다."(136~137)

  역사란 한두 명의 영웅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명령에 따라서 만들어져온 것이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가 처한 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비마다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다.(137)

  벤야민이 변증법적 이미지를 이야기하고 공허한 역사의 연속성을 폭파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속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한 가지는 "역사는 항상 동일하다는 견해, 반복에 불과하다는 가상을 쫓아버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진보는 시대의 경과의 연속성이 아니라 그러한 연속성에 대한 간섭"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141~142)

  균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사실'들을 모으는 역사주의에는 반성과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145)

  이를테면 전쟁이나 혁명 같은 것이 세상을 얼마나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 역사주의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146)

 

  2. 산책자의 시선 : 보드레르로부터

 

  보드레르에게 현실의 풍경들, 곧 거리의 군중과 허름한 뒷골목과 여인들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진실을 파편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알래고리였다.(169)

 

  3. 공부하는 자의 출구 : 카프카로부터

 

  카프카의 작품 「법 앞에서」의 시골 사람은 "법이란 정말로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법 앞에 있는 문지기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에게 문지기는 말한다. "이곳에서는 너 외에는 아무도 입장할 수 없어. 이 입구는 단지 너만을 위해서 정해진 곳이기 때문이야. 나는 이제 가서 그 문을 닫아야겠네." 벤야민이 감지한 카프카의 '개별성'은 법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카프카는 만인을 위한 법의 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202~203)

 

  『소송』에서 K가 의심하듯 "죄가 없는데도 심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무지하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도 이러한 재판 제도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 재판 제도의 연원은 선사시대로까지 소급된다. (……) 영문도 모른 채 법을 어기고 예상치 못한 벌을 받게 되었을 때,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운명'의 논리가 개입한다.(205)

 

 

    Ⅲ. 수집, 정리, 글쓰기

 

  1.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그는 수집에서 중요한 점은 그 사물이 갖고 있는 본래의 기능, 즉 유용성에서 벗어나 새롭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말한다.(212)

  "아이들은 건축, 정원일 혹은 가사일, 재단이나 목공일에서 생기는 폐기물에 끌린다."(213) (……) 폐기물, 즉 쓸모없는 것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은 새로운 것의 창안으로 연결된다.(214) (……) 아이들이 수집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어떤 '아우라'이다. 아이들이 모은 물건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리되고 보관된다.(215)

  그의 놀이는 학교의 질서, 즉 다양한 규칙과 명령으로 학생들을 복종케 하는 훈육에 저항한다는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217)

 

  수집품의 일부를 필요에 따라 원래 보관했던 상자에서 다른 상자로 이동시키듯, 그는 텍스트를 구성하는 단어와 문장 그리고 개별 단락들을 어느 한 곳에 고정시키지 않고 그것들이 어울릴 수 있는 글에 잘라다 붙이면서 그 각각이 고유하고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취급하여 활용했다.(219)

  그가 보여준 독특한 시각은 자료들을 발췌, 번역, 몽타주화, 재배치하는 데서 다시 확인된다.(221)

 

  2. 수집, 인용, 배치

 

  벤야민은 책과 장난감과 우표를 수집하듯 문장들도 수집했다. (……) 19세기 파리의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의 원―현상'을 밝히고자 한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다양한 책들에서 수집한 거대한 인용문들의 보관소이기도 했다.(227)

 

  "베껴 쓴 텍스트만이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린다. 이에 반해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사람은 텍스트가 원시림을 지나는 길처럼 그 내부에서 펼쳐 보이는 새로운 풍경들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228) (……)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 작업을 진행하는 방식은 다양한 성격의 책을 읽고, 읽은 것들 중에서 인용할 만한 문장을 수집하고, 그것들을 손으로 베껴 쓰고, 베껴 쓴 것들을 다시 각각의 상위 항목(이를테면 아케이드, 패션, 철골 건축, 수집가 등등) 카테고리 속에 재배치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그는 인용할 문장을 손으로 직접 베껴 씀으로써 그 내용과 의미에 더 가깝게 다가가고자 했다.(232~233)

 

  3. 무기로서 글쓰기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