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슈낙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차경아 옮김, 문예출판사, 1996.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는 「아이세여, 내 너를 사랑하노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씌어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애를 태우셨던 것이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가를 왔다 갔다 하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휠덜린1의 시, 아이헨도르프2의 가곡.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老木)이 섰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밤, 누구인가 모래자갈을 밞고 지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에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친구였지.
하고한 날을 도회(都會)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 방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때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 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이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과 G현. 가을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 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滿月)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3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Ⅰ
이제 이렇게 하던 일을 다 그만두고 국어책을 펴놓고 앉아 있던 그 교실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졸업식을 앞두고, 왜 그렇게 속을 썩였느냐며 막걸리와 추어탕을 사주시던 선생님…… 그 선생님이 보고 싶습니다.
나는 선생님을 배반했습니다. 인간이 될 수 있는, 나에게로 와 준 기회를 외면했습니다.
Ⅱ
'그래, 이런 건 정말 나를 슬프게 하지.'
'그렇지만 이 슬픔들을 고루 겪어볼 수 있는 세월은 아직 아득한 것이겠지?'
그 교실에서 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읽으며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그 아득했던 세월이 훌쩍 가버리고, 세상에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얼마든지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안톤 슈낙의 그런 것들은 그저 이제는 노파가 되어버린, 동경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던 그 소녀 같은 슬픔들일지도 모릅니다.
이 책도 그렇습니다. 선생님 앞에 책을 펴놓고 앉아 있던 그 시절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지,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읽었던 책입니다.
제Ⅰ부 젊은날의 전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내가 사랑하는 소음, 음향, 음성들
프랑컨에서 성장하다
불붙은 남자들
성 니콜라우스의 축일(祝日)
마인 강의 예선(曳船)
프랑컨의 꽃동산
실종된 아저씨
아버지와의 대화
불세례
허풍선이
학창시절의 친구들
음악시간
건초 예찬
첫 키스
프랑컨의 처녀들
제2부 밤의 해후
1912년 김나지움 학생들
사랑의 아득함
라일락 숲에서의 입맞춤
밤의 해후
몽블랑 봉 위의 로켓
간디, 향연에서 일어서다
우트레히트의 거미
염소의 나폴레옹
마인 강의 목재 화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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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0~1843 ; 독일 서정시인.
- 1788~1857 ; 독일 낭만파 민요시인.
- 1859~1952 ; 노르웨이 작가. 1920년 노벨문학상 수상. 가난, 방랑, 노동이 그의 작품의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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