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유숙자 옮김, 민음사, 2002
이 찬란한 여름에 설국(雪國)'이라니!
둘러댈 이유를 찾아볼까 싶었지만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밖에는 없습니다.
1980년대의 어느 날, 석박사 학위논문 계획 발표회에서 사창가 여성들의 이동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겠다고 하던 학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는 사창가 여성을 구경한 적이나 있을까 싶은, 남성의 특징을 고루 구비하고 있기나 한지 확인해보고 싶을 만큼 '얌전한'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그런 곳을 찾아다니며 조사하겠다는 건지……
이젠 그 학자가 누군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문제를 파헤쳐 발표하는 표정은 심각하지만 정작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는 불분명한, 한심한 학자가 아니면 좋을 것입니다.
♬
이 사랑 이야기는아무래도 '시마무라'(주인공) 혹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작가)의 일기가 분명합니다. 일기장에서 날짜들만 지웠을 것입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로서는 "당치도 않다!"고 잡아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럼, 당신 일기지?" 하고 시마무라에게 바짝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입니다.
무위도식하는 시마무라는 자연과 자신에 대한 진지함마저도 잃기 일쑤여서 이를 회복하려면 산이 제일이라고 자주 혼자서 산행을 즐기는데, 그날 밤도 국경의 산들을 돌아다니다가 이레 만에 온천장을 내려와서 게이샤를 불러달라고 했다.(18~19)
줄거리는 별것 없습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단편들이 털어놓는 신기하고 기막힌 혹은 다양한 이야기들에 비하면 이 중편소설은 고마코라는 예쁜 게이샤와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러면서 또 다른 여인 요코를 바라보며 몇 년을 지내다가 그 요코가 화재로 목숨을 잃는 걸 목격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
줄거리가 별것 없지만, 눈을 떼기는 어렵습니다. 책을 덮겠다면 그만이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여야 읽을 수 있어서 잡념 같은 건 던져두어야 합니다. 고마코와의 대화나 행동에, 그 상황 속에, 들어가야 읽을 수가 있습니다.
많이 망설이다가 이 장면을 옮기기로 했습니다. 시마무라가 고마코와 함께 화재가 난 곳으로 가는 중입니다.
「은하수예요. 예쁘죠?」
고마코는 중얼거리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다시 달려나갔다.
아아, 은하수, 하고 시마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방랑 중이던 바쇼*가 거친 바다 위에서 본 것도 이처럼 선명하고 거대한 은하수였을까.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 뿐 아니라, 군데군데 광운(光雲)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이봐, 기다려―」
시마무라가 고마코를 불렀다.
「어서 와요―」(142~143)
다소 살찐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모습을 보며 달리느라 금방 숨이 가빠졌다. 그러나 고마코도 갑자기 숨이 차, 시마무라에게 허청거리며 기댔다.
「눈이 시려서 눈물이 나요」
뺨이 달아오르는데 눈만은 차갑다. 시마무라도 눈꺼풀이 젖었다. 깜빡거리자 은하수가 눈에 가득 찼다. 시마무라는 흘러내릴 듯한 눈물을 참으며,
「매일 밤 이런 은하수인가?」
「은하수? 예뻐요. 매일 밤은 아니겠죠. 아주 맑네요」
은하수는 두 사람이 달려온 뒤에서 앞으로 흘러내려 고마코의 얼굴이 은하수에 비추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콧날 모양도 분명치 않고 입술 빛깔도 지워져 있었다. 하늘을 가득 채워 가로지르는 빛의 층이 이렇게 어두운가 하고 시마무라는 믿기지 않았다. 희미한 달빛보다 엷은 별빛인데도 그 어떤 보름달이 뜬 하늘보다 은하수는 환했고, 지상에 아무런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는 흐릿한 빛 속에 고마코의 얼굴이 낡은 가면처럼 떠올라, 여자 내음을 풍기는 것이 신기했다.
올려다보고 있으니 은하수는 다시 이 대지를 끌어안으려 내려오는 듯했다.
거대한 오로라처럼 은하수는 시마무라의 몸을 적시며 흘러 마치 땅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하고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당신이 가고 나면 전 성실하게 살 거예요」(145~146)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애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7)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흔히 이 첫 문장들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벌써 세 시간도 전의 일로, 시마무라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왼쪽 검지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바라보며,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군, 좀더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조바심치면 칠수록 붙잡을 길 없이 희미해지는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감촉으로 여전히 젖은 채, 자신을 먼데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군,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있다가, 문득 그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여자의 한쪽 눈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마음을 먼데 두고 있었던 탓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그저 건너편 좌석의 여자가 비쳤던 것뿐이었다. 밖은 땅거미가 깔려 있고 기차 안은 불이 밝혀져 있다. 그래서 유리창이 거울이 된다. 하지만 스팀의 온기에 유리가 완전히 수증기로 젖어 있어 손가락으로 닦을 때까지 그 거울은 없었다.
처녀의 한쪽 눈만은 참으로 기묘하게 아름다웠으나, 시마무라는 얼굴을 창에 갖다 대더니 마치 해질녘의 풍경을 내다보려는 여행자인 양 재빨리 표정을 바꾸어 손바닥으로 유리를 문질렀다.(10~11)
이 장면의 여인은 요코입니다. 게이샤 고마코가 순진무구하면서도 정열적, 야성적이라면 요코는 청순한 여인입니다. 시마무라는 내내 고마코와 사랑을 나누면서도 요코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 요코가 화재로 목숨을 잃고 이야기가 끝나는 것입니다.
고마코가 '현실'이라면, 현실의 여인이라면, 요코는 시마무라가 영원히 그리워해야 할 여성,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理想)'일까, 싶었습니다. 그 '이상'(요코)은 어느 날, 시마무라에게 다가와서 도쿄에 갈 때 데리고 가 달라는 부탁까지 했지만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요코에 대한 신비로움은 목소리만으로도 내내 이렇게 묘사되었습니다.
「역장님, 동생을 잘 돌봐주세요. 부탁이에요」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높은 울림이 고스란히 밤이 눈을 통해 메아리쳐 오는 듯했다.(9)
「고마짱, 이걸 타넘으면 안 돼?」
청명하여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메아리가 울릴 듯했다.(50)
……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어째서 저 처녀는 늘 저렇듯 진지한 모습일까 하는 엉뚱한 의문이 시마무라의 마음을 스쳤다.
요코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는 어딘가 눈 덮인 산에서 당장이라도 메아리쳐 올 듯 시마무라의 귀에 남아 있었다.(74)
「사이치로(佐一郞), 사이치로―!」 하고 요코가 불렀다.
눈 신호소에서 역장을 부른 그 목소리다. 들리지도 않는 먼 배에 탄 사람을 부르는 양,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103)
시마무라와 요코가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 사이에 어떤 교감 같은 건 전혀 없었고, 단지 요코에 대한 시마무라의 동경만 더 깊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코가 탕에서 부르던 노래를 듣고 이 처녀도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물레나 베틀에 앉아 저렇듯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요코의 노래는 참으로 거기에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털보다 가느다란 삼실은 천연 눈의 습기가 없으면 다루기 어려워 찬 계절이 좋으며, 추울 때 짠 모시가 더울 때 입어 피부에 시원한 것은 음양의 이치 때문이라고 옛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시마무라에게 휘감겨오는 고마코에게도 뭔가 서늘한 핵이 숨어 있는 듯했다. 그 때문에 한층 고마코의 몸 안 뜨거운 한 곳이 시마무라에게는 애틋하게 여겨졌다.(132~133)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제시하고 싶은 주제가, 현실(고마코)과 이상(요코),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다는 이 생각은, 억지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유명한 소설이어서 당연히 좋은 해설이 많을 것입니다.
♬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시나 소설, 수필 같은 걸 배울 차례가 되면 자신이 그 작품을 쓴 작가인 양 즐거워했고, 심지어 그 작가 대신 으스대기조차 했습니다. 교과서에는 나오지도 않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야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런 분이 국어 선생님이었습니다. 게다가 공부 시간에 몰래 교실을 나와서 선생님들이 밤에 학교를 지키는 숙직실에 들어가 담배를 한 대씩 피워 물고 바둑을 두다가 들켰는데도 "교무실에 가 있어!" 하고는, 수업을 끝내고 들어오면서 스스로 무릎을 꿇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고는 다른 아무 부탁도 하지 않고 보내준 담임 선생님이었으니 우리가 대학에 제대로 갈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했는데, 그러나 그분을 원망할 마음은 전혀 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가와바타 야스나리" "가와바타 야스나리" 하더니, 불과 몇 년 후 이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노벨상, 더러 돈이나 욕심 같은 것으로도 거래를 하고 그러면 좋아할 사람들이 있을 텐데 굳이 실력으로만 주겠다는 듯한 그 노벨상, 그런 상을 주겠다는데도 못받은 이, 심지어 도도한 자세로 거절한 이도 있지만, 우리는 애가 타서 기대하는 그 노벨상.
누가 좀 멋지게 쓴 일기를 정리해서 발표하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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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 : 일본 전통시 하이쿠(俳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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