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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김혜진 장편소설 『중앙역』

by 답설재 2014. 8. 1.

김혜진 장편소설 『중앙역(웅진지식하우스, 2014)

 

 

 

 

 

 

 

 

 

늦은 밤 공사는 중단된다. 역사를 중심으로 길을 넓히고 도로를 다지던 작업이 멎고 인부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도시 전체가 죽은 것처럼 고요하다. 제 그림자를 밟고 서 있는 포클레인이나 불도저 곁을 지난다. 조감도를 비추는 조명이 환하다. 길을 넓히고 다지는 일들이 끝나면 광장 중앙에 분수가 설치되고 에스컬레이터와 무빙워크가 완성될 것이다. 조감도 속 역사는 지금보다 화려하고 크고 아름다워 보인다.  캐리어를 끌며 역사 주변을 한 바퀴 더 돌기로 한다. 운이 좋으면 낮엔 보지 못했던 적당한 자리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밤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빈자리를 함부로 차지하는 건 위험하지만 나는 호기를 부린다.(11~12)

 

소설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노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접속사가 거의 없는 현재형 문장으로 이어지고, 짧은 문장들이어서 빨리 읽히는 것 같고, 처연함을 느끼게 합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시나리오 『히로시마 내 사랑』이 연상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느껴지고, 그런 곳에서도, 그러니까 노숙자들이 뒹구는 역 광장에서도 서로를 만나게 되니까 '남녀 관계'가 이루어지고, 그럴 때의 공식처럼 한쪽이 다른쪽에게 집착하게 됩니다. 남자는 충분히 젊고 여자는 형편없이 행동하고, 늙고, 병들어 있는데도 그렇게 됩니다.

 

…… 날이 밝으면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지고 없다. 잠에서 깬 여자는 먼 여행을 다녀온 사람처럼 피곤을 머금고 몸을 일으킨다. 두꺼운 권태와 체념을 다시금 껴입는다. 간밤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넌 너무 어려.  여자는 단호하게 말하고 내게서 물러난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니.(97)

 

별일도 아니잖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오히려 따져 묻는 쪽은 항상 여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궁금하다고, 알고 싶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물으면 여자는 이렇게 되물을 게 뻔하다.  그냥 이대로도 충분하지 않니? 뭘 더 바라는 거니?(102)

 

여자와 나는 서로를 선택한 게 아니다. 우리를 만나게 한 것은 거리의 삶이다. 역사 안에 고인 시간이다. 나는 여자의 주름진 얼굴과 거친 피부를 떠올린다. 그런 식으로 여자에게 없는 내 젊음을 두둔하려고 해보지만 여자와 다를 건 없다. 여자 역시 이곳이 아니라면 나를 만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114~115)

 

또, 인간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두려움이 느껴질 만큼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오랫동안 여자와 함께 누울 수 있는 방을 바라왔는데 막상 그 방에 누워 있는 지금 숨이 막히고 갑갑하다. 당장이라도 거리로 뛰쳐나가 헤드라이트와 소음이 무시로 지나다니는 거리 위에 눕고 싶다. 먼지와 말들이 쉬지 않고 떠다니는 그곳에서 잠을 청하고 싶다.(216~217)

 

우리는 지저분한 몸을 내보이고 비비고 마주 댄다. 그러면서 굶주림 같은 욕망을 해소하는 데에만 몰두할 뿐이다. 누군가 길 위에서 그러고 있는 우리를 본다면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욕을 하거나 구역질을 해댈 것이다. 센터 직원들이 길 위에서 동물처럼 뒹구는 우리를 두고 수근거린다는 것을 안다. 더럽다느니 끔찍하다느니 하는 말을 엿들은 적도 있다.  살아 있는 내 육체가 혐오스럽다. 사는 게 이토록 힘겨운데 쉬지 않고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허기를 느끼고 다른 누군가의 체온을 바란다는 게 징그러울 정도다. 인간다움과는 거리가 먼 이런 방식으로 내 몸이 바라는 걸 해결해줘야 한다는 게 끔찍하다. 아무렇게나 아무데서나 몸을 섞고 신음을 내뱉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내가 짐승과 다를 게 무엇인가.(285~286)

 

 

 

 

'젊은 남자'는, 그해 한겨울 어느 날, '병들고 늙은 여자'를 병원 응급실에 두고 도망쳐 나옵니다. 그리고는 검은 작업복에 헬멧을 쓰고 파이프를 쥔 철거반, 한때 여자와 함께했던 그 쪽방촌 철거반에 들어갑니다.

 

이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던 여자의 두 눈이 전부다. 허무와 공허로 가득 찬 여자의 눈 속에서 겁 없이 떠돌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 눈은 오래 전 내가 했던 말들을 빠짐없이 기억할 것이다. 여자의 깊은 두 눈 속으로 천천히 잠기는 말들을 떠올린다. 한때 잔잔한 수면을 흔들고 물결을 만들고 파동을 일으키던 고백들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여자의 두 눈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모습을 상상한다.(297)

 

자신을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 남자는, 노숙자가 아닌 우리와 어떤 점이 다른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그 젊은이보다 깨끗한 곳에서 지내는 것이 다른 점이 아닐까 싶고, 어쩌면 질서와 통제가 더 잘 유지되는 곳에서 지내는 것이 아닐까 싶고, 그런 것들 때문에 '프라이버시'라는 게 확보되는 것이 그와 나의 다른 점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 좌절과 고독 속에서도 삶이 이어지는 점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이곳'의 우리의 삶처럼, 세월이 끝없이 흐르는데도 우리에겐 언제나 현재가 있을 뿐인 것처럼 소설의 끝부분은 처음 부분과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호를 기다린다. 날이 밝으면 예고한 대로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저곳으로 돌진해 모든 걸 부수고 망가뜨릴 것이다. 나는 사소한 것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고 중얼거린다. 빈 방인 그곳에 우리 손길이 닿은 물건, 체온이 스민 이불, 체취가 베인 벽지 같은 것들이 남아 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나. 나는 추억이나 기억 따위를 믿지 않는다. 그건 희망이나 기대처럼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실체가 없고 다만 거기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것들, 그런 것들은 사람을 들뜨게 하고 결국엔 망쳐버리고 만다.  …(중략)…  끝없이 이어지는 밤 속에서 아침을 기다린다. 바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좁은 골목을 빠져나간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린 눈을 깜빡인다. 누군가 뒤쪽에서 얼어붙은 담벼락을 탕탕 때린다. 줄지어 선 사람들이 한꺼번에 벽을 치면서 고함을 지른다. 금방이라도 벽이 무너질 것 같다. 나는 젖혔던 캡을 닫고 새벽이 오는 하늘을 올려다본다.(297~298)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좌절과 고독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싶었고, 차가운 한겨울 새벽의 저 움직임이 바로 생명을 이어주는 '현재'이고, 그것은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는 나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무책임한 말일지 모르지만, 추락, 공허, 좌절, 파멸 같은 게 사실은 인간의 끝은 아닐 것입니다. 저 젊은이의 가슴속에는 그 늙고 병든 여자가 살아 있을 것 같고, 바로 그것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 확실하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 젊은 남자가 최소한 그렇게 살아가기를, 내가 그에게 그렇게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모처럼 편안하게 읽었습니다. 술술 넘어가서 얼른 읽을 수 있었습니다. 번역이 아닌 책을 읽는다는 게 이처럼 좋아서 더러 '내가 지금 제대로 읽고 있는 건가?' 싶었습니다. 딴 생각을 하다가 놓치는 경우에도 조금만 되돌아가 읽으면 금방 흐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말 우리글을 읽는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자존심이나 자존감. 그런 것들이 정말 있다면 그건 스스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떨어뜨리고 마는 거다. 다시는 찾지 못하게 되는 거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멀리서 오는 최악을 기다리는 일뿐이다.(29)

 

독자들이 좀 소홀하게 여길까봐 그렇게 한 것인양 어느 곳에나 아포리즘 같은 문장을 넣어 놓았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노숙자의 생활과 내면을 그렇게까지 묘사한 '젊지 않은' 소설가가 1983년생이라는 사실도 놀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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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치킨런>으로 등단했으며 같은 해 대산창작기금을 받았다. 2013년 중앙역》으로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