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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사랑68

최인훈 《광장》 최인훈 《광장》 문학과지성사 1996 서 문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 년래의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광장에 대한 풍문도 구구합니다. 제가 여기 전하는 것은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우리 친구의 얘깁니다. (……) (『새벽』, 1960년 10월) 1961년판 서문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2018. 11. 26.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전은경 옮김, 들녘 2014 1 라틴어, 헤브라이어, 그리스어에 능통한 교사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57)는 한때 제자였던 젊은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책 읽기와 고전문헌학이 전부인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런 그가 비 내리는 날 아침 출근길에 키르헨펠트 다리 위에서 한 포르투갈 여인을 만납니다. 신비감을 품은 그 여인은 자살을 시도한 직후였습니다. "모국어가 뭐지요?" 그는 조금 전에 이렇게 물었다. "포르투게스(Portugués)." '오'는 '우'처럼 들렸고, 올리면서 기묘하게 누른 '에'는 밝은 소리를 냈다. 끝의 무성음 '스'는 실제보다 더 길게 올려 멜로디처럼 들렸다. 하루 종일이라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 2018. 10. 17.
"개사랑합니다!" 1 '존나(졸라)' 이야기를 쓰고 난 다음 "우리말 123"이라는 사이트에 '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걸 봤습니다. 우리말에서 '개'는 앞가지(접두사)로 쓸 때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이라는 뜻으로 개금, 개꿀, 개떡, 개먹, 개살구, 개철쭉처럼 씁니다. 2. (일부 명사 앞에 붙어) '헛된', '쓸데없는'이라는 뜻으로 개꿈, 개나발, 개수작, 개죽음처럼 씁니다. 3. (부정적 뜻을 가지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한'이라는 뜻으로 개망나니, 개잡놈처럼 씁니다. '개좋다'는 아마도 '무척 좋다'는 뜻인 것 같은데, '개'가 부정적 뜻을 가지는 일부 이름씨(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 2018. 7. 29.
「사랑」 사 랑 김 언 그건 내게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을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주어야 사랑이라고 한다. 그것이 무어든 그것은 내게 없는 것이어야 하고 네게 주어야 하는 것이고 네게 줄 수 없다면 다른 것은 필요 없다. 내게 없는 것이어야 한다. 내게 없는 것만 있다. 내게 없는 것만 네게 줄 수 있는 것. 그걸 꺼내어 네 품에 안겨주는 것. 내게 없다는데도 바다처럼 흔한 것. 바다처럼 넓은 것. 바다처럼 깊고 빠져나올 수 없는 그것을 다시 꺼내어 네게 안겨주는 것. 바다는 멀다. 바닷가 출신에게도 멀다. 줄 수 없기에 가질 수 없는 것. 가질 수 없기에 주어야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배운다면 참으로 난감한 바다가 멀리 있다. 만질 수 없는 바다.. 2018. 1. 4.
사랑의 여로 그는 물리학을 사랑했습니다. 어쩌면 명예와 화려한 활동도 사랑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합니다. 사랑이라니! 그가 사랑한 대상은 오래전에 떠난 그의 부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 얘기를 해도 좋을 때, 그런 장소에 앉게 되면, 그는 먼 나라의 유명한 대학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그의 연구실 얘기도 하고, 한시도 잊은 적 없다는 그의 부인 얘기도 합니다. 그가 지금 그 먼 나라에 있지 않고 여기 우리 동네에 와 있는 것도 사실은 그 부인과의 추억이 너무나 생생해서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명예? 국가·사회적 활동? 분명히 그런 것도 좋아하긴 했습니다. 멋진 나라들의 음식 얘기도 하고, 부인과 함께 그런 나라의 한적하고 행복한 길을 걸은 얘기도 하고…… 여러 나라 대통령을 만난 .. 2017. 9. 12.
사랑도 배워야 할 수 있다 "가엾은 폴! 이렇게 늦은 나이에 수도승처럼 살다가 이제는 마음까지 편치 않다니! 애를 돌보려 하다니 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에요! 추상적으로는 어린 드라고를 사랑하고 싶겠죠. 하지만 현실이 그걸 계속 가로막는 거예요. 폴, 우리는 의미만 갖고서는 사랑할 수 없어요. 우리는 배워야 해요. 영혼들이 높은 곳에서 내려와 다시 태어나겠다고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예요. 우리와 벗하며 커가면서, 사랑의 어려운 길을 따라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죠. 처음부터 당신은 천사와 같은 뭔가를 드라고에게서 보았죠. 당신이 틀린 건 아니에요. 드라고는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더 오랫동안, 세속을 벗어난 본질과 맞닿아 있었어요. 당신의 실망감과 노여움을 극복하세요. 가능할 때 드라고에게서 배우세요. 조만간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영광의.. 2017. 7. 31.
마누엘 푸익 《조그만 입술》 마누엘 푸익 《조그만 입술》 송병선 옮김, 책세상 2004 1 '레테'는 연옥 입구의 강이랍니다. 언젠가 연옥은 없는 것으로 정했다는 글을 읽은 것 같은데 그러면 지옥도 그렇게 될 수 있겠지요? 하기야 천국이고 천당이고 뭐고...라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리움", "그리움" 하지만 레테가 생각날 때보다 더 큰 그리움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걸 다 잊게 된다? 어떻게? 이 누추함까지 다 떨쳐버릴 수 있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아무리 험난한 저승에서라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잊지는 않아야 할 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 모든 것 다 내어주더라도 그 기억만은 간직하고 싶다면 그 강변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어놓아야 할 그 순간 그가 얼마나 그리울지, 생각만으로도 나는 눈물을 글썽.. 2016. 12. 24.
조지 오웰 《1984》 조지 오웰(소설)《1984》George Orwell : Nineteen Eighty-Four김기혁 옮김, 문학동네 2016      Ⅰ  '소설이다' '소설일 뿐이다' 하며 읽는데도 자주 그 상황이 실제 같아서 빠져들며 읽었다. 공포감이 엄습했다.자신이 인간이란 게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인간이 권력 앞에서 어떻게 절망하고, 패배하고, 파멸해 가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금 이 세상은 이 소설 속 세상의 다음 세상인가?그렇다면 좋겠지만, 앞으로 이런 세상이 올 수도 있다는 건 아닐까?  Ⅱ  세계는 오세아니아와 유라시아, 동아시아의 3대 초강대국으로 나뉘어 전쟁을 하고 있다. 전면전이나 종전도 없고 승리도 패배도 없이 줄기차에 계속되기만 하는 전쟁. 구호는"전쟁은 평화"다.오세아니아는 당이 사상과 역사.. 2016. 9. 21.
도스토예프스키 《백야》 F. M. 도스토예프스키 《백야》 이상각 | 인디북, 2009 Ⅰ 나스첸카, 우리는 그토록 오랜 세월을 헤어졌다가 만난 두 영혼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천 년 전에도 이미 당신을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심정이랍니다. 나스첸카, 어쨌든 나는 오랫동안 누군가를 찾아 헤맸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분명하게 당신을 찾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나도록 되어 있었다는 증거 말입니다.(44) 밤이 깊어 헤어져야 할 시각이 다가왔을 때, 서로의 품에 안겨 폭풍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눈썹에서 눈물방울이 흩날리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설움의 격정 속에 잠겨 있던 것은 과연 그녀가 아닐까요? 이런 모습을 한낱 꿈이라고 외면해 버릴 수 있을까요?(51) 미모나 성품이나 뛰어난 여성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2016. 6. 22.
가와바타 야스나리 《서정가抒情歌》 가와바타 야스나리 《서정가抒情歌》천상병 옮김, 살림 세계명작산책(1. 사랑의 여러 빛깔) 2014       Ⅰ  죽은 사람을 향해 말을 건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인간의 습성이라고 하겠습니다.하지만, 저승에 가서도 이승에서 지녔던 모습으로 살아있는 줄로 안다는 것은 더욱 슬픈 인간의 습성이라고 생각됩니다.식물의 운명과 인간의 운명과의 유사점을 느끼는 것이 모든 서정시(抒情詩)의 영원한 제목이다―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마저도 잃어버렸고, 그뒤에 계속되는 구절도 모르고 이 말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식물이란 다만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것만이 그 뜻인지, 보다 더 깊은 뜻이 깃들어 있는지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불교의 여러 경문(經文)을 비길 데 없이 귀중한 서정시라고 생각하는 요즈.. 2016. 3. 3.
가와바타 야스나리 『산소리』 가와바타 야스나리 『산소리』 신현섭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0 Ⅰ 싱고 부부는 아들 슈이치 부부와 한 집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들이 바람을 피우는데 딸 후사코마저 친정으로 돌아옵니다. 사위 아이하라가 마약 중독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건 며느리 기쿠코가 낙태를 한 일입니다. 바람을 피우는 슈이치에 대한 복수 같습니다. 싱고는 고독합니다. 인생관이 자신과 다른 아들 슈이치와의 관계도 그렇지만 아내 야스코도 싱고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싱고 자신도 동경했던 연상의 여인이 죽자 그녀의 동생 야스코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고 야스코도 사실은 미남인 형부를 사랑했었습니다. 언니가 죽자 당장 형부와 살고 싶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그런 감정을 감추고 살아왔습니다... 2015. 12. 6.
인연 잊어가기 Ⅰ 子曰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독립하고, 마흔에 불혹(不惑)하고, 쉰에 천명(天命)을 알고, 예순에 이순(耳順)하고, 일흔에 하고싶은 바를 좇되 법도(法度)를 넘지 않았느니라. (孔子) 爲政 四 子曰 『五十有五에 而志于學하고 三十而立하고 四十而不惑하고 五十而知天命하고 六十而耳順하고 七十而從心所欲하야 不踰矩호라』). 나의 경우에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여기에 이르러, 무엇을 숨기거나 안 그런 척 그런 척하기는 싫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드디어 다 드러내고, 그렇게 하여 홀연히 가고 싶습니다. 지나가버린 일들은 일일이 설명하기가 싫긴 합니다. 일어난 일은 금방 기억의 저쪽으로 사라져가서 마침내 아득해지고, 그 일들과 함께 사람.. 2015. 1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