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마누엘 푸익 《조그만 입술》

by 답설재 2016. 12. 24.

마누엘 푸익 《조그만 입술》

송병선 옮김, 책세상 2004

 

 

 

 

 

 

1

 

'레테'는 연옥 입구의 강이랍니다. 언젠가 연옥은 없는 것으로 정했다는 글을 읽은 것 같은데 그러면 지옥도 그렇게 될 수 있겠지요? 하기야 천국이고 천당이고 뭐고...라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리움", "그리움" 하지만 레테가 생각날 때보다 더 큰 그리움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걸 다 잊게 된다? 어떻게? 이 누추함까지 다 떨쳐버릴 수 있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아무리 험난한 저승에서라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잊지는 않아야 할 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 모든 것 다 내어주더라도 그 기억만은 간직하고 싶다면 그 강변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어놓아야 할 그 순간 그가 얼마나 그리울지, 생각만으로도 나는 눈물을 글썽거리게 됩니다. ……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옆에 있어도 그립다더니, 미리 자꾸 생각하는 수밖에요.

 

자, 그곳에서 목욕을 한 영혼들은 나쁜 기억은 모두 지워버리고 천국을 향해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데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요? 천국이라니, 공짜 천국은 없다는 걸 확신하는 사람이 적어도 수천만, 아니 수십억 명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주제에도 '혹시?' 하고 불현듯 일어나는 욕심을 누르며 살아가지만, 저 잘난 척하는 것들이, 이승에서 판을 치는 것들이, 권력이나 돈으로 사람들 가슴에 쇠못을 박는 것들이, 그 강가에 이르러 벌거벗고 허둥대는 꼴들을 그려봅니다. 어차피 나도 거기에서 그것들과 함께 허둥댈 테니까, 잘하면 몇 명쯤은 만날 수 있겠지요. 벌거벗고 함께 허둥대면서……. ㅎ~

 

 

2

 

그렇긴 하지만 가령 그동안 가르친 아이들 중 제일 가난한 집 아이 J, 어머니 아버지가 어느 길모퉁이 교회 집사인 가정에서 태어나 걸핏하면 눈물을 흘리며 지내다가, 그 한 해의 인연을 따라 오랜만에 다시 찾아갔을 때조차 정담(情談)은커녕 한 마디 인사도 못한 채 내 품에 안겨 두어 시간 서러운 눈물만 흘리고 집으로 돌아간 그 아이 J……

 

드디어 중학생이 된 어느 해 봄날, 소풍가는 날 아침, 지하철 공사장 옆을 지나다가 가스 폭발 사고로 홀연히 저승으로 가버린 그 아이 J는 그 '고마운' 강물에 목욕을 하고 좋은 곳에 가 있겠지요?

 

"후안 카를로스, 생각해봐, 레테 강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멋져! 영혼들은 그곳에서 나쁜 기억을 떨쳐버리고 불안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모두가 지나간 고통을 기억해, 그리고 고통이 존재하지도 않는데 고통을 봐, 그건 바로 마음속에 고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야, 그들은 레테 강을 지나가면서 모든 걸 엎지르고 더럽혀." ……. "영혼들은 그 검은 속죄의 동굴에서 나오고, 천사들은 그들에게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을 알려주지. 영혼들은 겁에 질려 다가가." ……. "마지막으로 영혼들은 물 속에서 성유를 바르게 돼. 고통의 베일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이제는 눈을 들어 처음으로 하늘의 얼굴을 바라보게 돼. 후안 카를로스 자네 고통의 베일을 벗어버려. 그 베일 때문에 가장 맑은 하늘을 보지 못할 수도 있어."(150~151)

 

 

3

 

꿈·희망·기대 같은 것도 있긴 하지만 누추하거나 별 볼 일 없거나 매번 실망만 안겨주는 현실도 있어서, 그 두 가지는 언제나 절실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게 머리를 떠난 적이 없어서 다른 사람도 그런가 싶었습니다.

 

아름다운 영화 속 여인의 그림자가 스칩니다. 차마 나와 같은 종류로 구분할 수는 없는 존재들입니다. 입과 돈과 권력으로만 살아가는 웅장한 존재도 나와 같은 종류는 아닐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사람, 그 우람한 사람에게도 꿈과 현실은 다른 것일까요?

 

 

4

 

온갖 일들, 꿈이었던 것들을 써서 주고받은 편지를 태우고 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핑크빛 리본이 묶인 편지들은 불 속으로 떨어져, 흩어지지 않은 채 불에 탔다. 반면에 하늘색 리본은 풀어져 있었기에, 그 리본에 묶였던 편지들은 불에 타면서 굽이쳤으며, 소각로의 화덕 안으로 흩어졌다. 불길은 흩어진 종이들을 검게 태우고 완전히 흔적 없이 만들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잠시 그 편지들을 환하게 비추었다.

"벌써 내일이면 이번 주가 끝나……"

"……금발은 믿지 말라고 말해주었어. 그런데 베개에게 뭘 물어볼 거지?……"

"악어의 눈물을 몇 방울……"

"영화 보러 갈 거야? 누가 너한테 초콜릿을 사줄 거지?……"

"……내가 금방 알아챌 테니까 더러운 속임수는……"

"……네가 '그만'이라고 말할 때까지 키스를 보내. 후안 카를로스……"

"……너무나 참은 나머지 병들어 죽을지도……"

"침대가 하나 빈다는 것은 누군가가 죽었다는……"

"금발의 네네*. 맹세하는데 키스 한번만 할게……"

"내가 완전히 낫지 않은 채 돌아간다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오늘 약속 하나 할게. 의사의 지시를 충실히 지키겠어……"

"……편지지가 끝나가고 있어……"

"……지금 난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느끼고 있거든……"

"……너와 잠시 말하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어. 그러니 널 보면 어떨까?……"

"……그 누구보다도 널 사랑해……"

"……코스킨에는 종합병원도 하나 있어……"

"……새 소식 있으면 다시 쓸게……"

"……강물은 따뜻하고……"

"……너 역시도 멀리 있어……"

"……하지만 네 편지를 읽을 때마다 자신감이 생겨……" (끝, 315~316)

 

 

 

..................................................................
* 마치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구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 '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