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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가와바타 야스나리 『산소리』

by 답설재 2015. 12. 6.

가와바타 야스나리 『산소리』

신현섭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0

 

 

 

 

 

 

싱고 부부는 아들 슈이치 부부와 한 집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들이 바람을 피우는데 딸 후사코마저 친정으로 돌아옵니다. 사위 아이하라가 마약 중독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건 며느리 기쿠코가 낙태를 한 일입니다. 바람을 피우는 슈이치에 대한 복수 같습니다.

 

싱고는 고독합니다. 인생관이 자신과 다른 아들 슈이치와의 관계도 그렇지만 아내 야스코도 싱고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싱고 자신도 동경했던 연상의 여인이 죽자 그녀의 동생 야스코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고 야스코도 사실은 미남인 형부를 사랑했었습니다. 언니가 죽자 당장 형부와 살고 싶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그런 감정을 감추고 살아왔습니다.

 

싱고는 전쟁의 충격으로 성 불능 상태입니다.

 

 

 

싱고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삶의 허무감에 휩싸이고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도 남몰래 딸 후사코의 시댁에 경제적 지원을 하고, 며느리 기쿠코가 중절을 한 그 시기에 아들 슈이치의 아이를 임신한 정부(情婦) 기누코(전쟁 미망인)를 찾아가 압력을 넣기도 합니다.

 

가슴속에 각각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 가정에서 서로 이해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유일한 관계가 싱고와 며느리 기쿠코입니다. 싱고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이미지를 기쿠코에게서 발견합니다.

 

 

 

여기까지라면 이 소설은 일반 멜로드라마나 통속소설과 유사하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하기도 난처한 며느리와의 애정 행각이 축축하게 묻어나는 장면이 나오거나 그렇지 않거나가 구분의 조건이 되겠지요.

시아버지 싱고와 며느리 기쿠코의 관계는, 싱고가 동경했던 그 연상의 여인에 대한 집착과 현실에서의 터부에 대한 심리 묘사로써 이어집니다.

그런 심리를 엿볼 수 있는 여러 장면 중 마지막 장면입니다.

 

기쿠코는 꺾꽂이가 끝난 쥐참외를 좌우로 보고 있었다.

싱고도 그 꽃을 바라보면서

"기쿠코, 분가하거라." 하고 갑자기 말했다.

기쿠코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고 일어서더니 싱고 옆으로 와 앉았다.

"분가는 무서워요. 그이가 무서워요." 하고 기쿠코는 야스코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기쿠코는 슈이치와 헤어질 생각이 있는 거니?"

기쿠코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만일 헤어진다면 아버님께 어떤 시중이라도 해 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기쿠코의 불행이야."

"아니요, 기꺼이 하는 일에 불행은 없어요."

처음으로 기쿠코가 정열의 표현을 하는 것 같아서 싱고는 놀랐다. 위험을 느꼈다.(307)

 

소설은 이들 가족이 단풍 구경을 가려는 계획을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일상은 언제까지라고 정해지지 않은 채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다만, 언제나 크고작은 숙제는 남아 있는 것처럼 그 단풍 구경 때 집을 지킬 사람은 정해지지 않은 채였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묘하게 느껴지는 작가입니다.

50여 년 전,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여러 번 그 이름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작가에 대한 존경과 감탄을 담은 표정이 역력했는데 나중에 『설국』을 읽을 때 그 선생님의 표정을 떠올리며 좀 유치한 생각까지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애정소설을 읽고 감탄하셨나?'

 

『잠자는 미녀들』도 그렇고, 단편집 『손바닥 소설』의 여러 작품도 그런데, 16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 『산소리』의 앞에 특별히 따로 넣어 놓은 단편 『정사』도 제목부터 그런 느낌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예전에 누나들의 방에서 맡을 수 있었던 슬픈 분 냄새 같은?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슬픔 같은? 여성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 잘 모르던 시절에 본 수채화 속의 소녀 같은 ……

 

"오가타 싱고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입을 조금 벌리곤 뭔가 생각에 골몰하는 모습이었다."

소설이 시작되는 문장입니다. 이렇게 3인칭으로 된 소설인데도 읽는 내내 마치 싱고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899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국문과로 전과(轉科)했답니다. 여담이지만, '수능' 성적에 따라 진로를 결정한 학생에게는 전과를 좀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좋은 일(善處)일 것입니다. 작가가 그런 처지였다는 건 아니고, 현재의 우리나라 학생들 중에 그런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그는 일찍이 부모와 조부모를 여의고 외숙부 집에서 자랐으며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순회 악극단의 일행과 길동무가 되기도 했답니다.

1968년 일본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이름이 풍기는 건 그렇지 않은데 1972년에 가스 자살로 그 생애를 마감했답니다.

 

 

 

어처구니없다고 하겠지만, 이 책은 서점의 '도서 검색'으로는 찾지 못했습니다. 어디에서 『山の聲』이라는 작품명을 보고 그 이름에서 신비감을 느껴서 서점에 갈 때마다 "산의 소리"라고 써넣어 검색했는데 컴퓨터는 그걸 알아듣지 못했고, 나도 "산소리"라고 써넣을 만한 주제는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이라면 귀신인 "언덕에서"(블로그 ,BLUE & BLUE")님이 이 책을 낸 출판사를 알려주었습니다.

『산의 소리』 『산소리』에 따라 이 책을 찾고 찾지 못하는 운명이 결정되는 것처럼 사람들끼리도 그렇게 하여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할 수도 있을 것 아닙니까?

혹 사랑도 그럴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