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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등대지기 Latarnik』

by 답설재 2015. 11. 17.

헨리크 시엔키에비치『등대지기 Latarnik(단편)

김은영 옮김, 작은키나무, 2006.

 

 

 

 

 

 

 

 

폴란드에서 온 스카빈스키 노인은 파나마 근처 에스핀월 항구의 등대지기입니다. 산전수전에 지칠대로 지쳐서 아이작 팰콘브릿지 영사에게 자신을 채용해 달라고 애원한 것입니다.

 

"(…)저는 늙었고 이젠 쉬고 싶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 이제 내가 쉴 곳은 이곳뿐이다! 이곳이야말로 나의 안식처다!' (…) 영사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일은 당신 한 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이런 자리가 제 일생 동안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파나마에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었는지…… 간청합니다. 저는 정박하지 못하면 곧 침몰하고 말 배와 같은 처지입니다. 제발, 이 늙은이를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맹세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젠 떠돌이 생활에 진절머리가 납니다."(21)

 

 

 

 

그 나이의 노인이라면 산전수전을 겪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를 돌아서 지금 여기까지 왔느냐가 문제이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가 문제이지, 얼마나 힘들고 복잡하고 어려웠는지는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달라서 누가 더 혹독한 산전수전의 주인공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스카빈스키의 산전수전 이야기를 더 모아 봤습니다.

 

" (…) 이 십자 훈장은 제가 1830년 폴란드 봉기 때 받은 것이고, 이것은 스페인의 킬리스트 전투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프랑스 군 시절에 받은 것이고 마지막으로 이것은 헝가리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미국에서 남군과 대항해 싸웠지만 그들은 제게 아무 훈장도 주지 않더군요. 자, 한번 확인해 보시죠."(19~20)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금광의 광부, 아프리카에서는 다이아몬드 채굴자, 동인도에서는 소총병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농장을 시작했을 때는 가뭄으로 실패했으며, 브라질 내륙에서 야만인들과 무역을 할 때는 그의 배가 아마존에서 침몰하였다. 그때 그는 아무 장비도 없이 헐벗은 상태에서, 야생 열매를 따먹고 맹수들의 습격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수주일 동안 밀림을 헤매기도 했다.

그는 또 알칸사스의 헬레나에서 대장간을 차려보았지만 그것 역시 도시의 대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는 로키 산맥을 지나다가 그곳의 인디언들에게 포로가 되기도 했고, 그러다 얼마 후 어느 사냥꾼에 의해 구출되기도 했다.

그는 바히아와 보르도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배에서 선원으로 일했고, 그 이후에는 포경선의 작살잡이로 먼 바다까지 나갔었다. 그러나 그가 탄 두 배들은 모두 난파되었다.

그는 하바나에서 동업자와 함께 담배 공장을 차렸으나 그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 사이 동업자가 사기를 치고 달아나버렸다.(23~24)

 

 

 

 

등대지기가 된 스카빈스키는 탑과 등대, 절벽, 모래사장, 고독에 익숙해집니다. 바위틈에 알을 낳고 등대 지붕에 모여드는 갈매기들과도 친해지고, 썰물이 되면 야트막한 모래톱에 나가 대합조개, 껍데기가 진주색인 앵무조개를 줍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달빛과 등대 불빛을 이용해서 물고기가 많은 바위틈을 찾아 밤낚시를 즐겼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절벽과 땅딸막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그 작은 바위섬을 사랑하게 됩니다.

 

노인은 세상일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집니다. 처음에는 진한 향수를 느꼈지만, 나중에는 체념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조국 폴란드의 한 위대한 작가의 시집이 배달되어 온 것입니다.

실로 40년 만에 모국어로 된 시집을 펴든 노인은,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리움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날이 저물었고, 숲이 우거진 고향의 언덕과 푸른 초원을 찾아간 그의 영혼은 이튿날 마침내 항구 경비원이 찾아올 때까지 그대로였습니다.

 

 

"무슨 일이오? 어디 아프신가요?"

"아…… 아니오."

"어젯밤엔 등대불을 켜지 않으셨더군요. 그래서 노인장께선 등대지기 자리에서 해고되었습니다. 세인트제로모에서 오던 배 한 척이 근해에서 침몰했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만일 그러기라도 했더라면 노인장께서는 재판을 받아야 했을 거요. 자, 함께 배를 타시죠. 나머지는 영사님께 듣도록 하시구요."(44)

 

 

 

 

스카빈스키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소설은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다만 뉴욕으로 가는 증기선을 탄 그의 모습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며칠 새 더 늙고 구부정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만은 여전히 햇살처럼 빛났다. 그의 품안에는 새로운 인생길의 동반자가 될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그는 때때로 그것을 손으로 눌러보며 확인하였다. 마치 그것마저도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듯이. 다시는 잃지 않으려고 다짐이라도 하듯이.(44~45)

 

천신만고 끝에 얻은 일자리, 그것도 그처럼 만족해 하던 일자리를 잃고도 살아갈 수 있으려면 그만한 의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렇게 책 한 권을 가슴에 품고 있는 그의 영상에 나 자신을 비추어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나에겐 그 시집과 같은 것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