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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야생의 삶』

by 답설재 2015. 12. 10.

  미셸 투르니에 지음| 고봉만 옮김

『방드르디, 야생의 삶 Vendredi ou la vie sauvage』

  문학과지성사, 2014.

 

 

 

 

 

 

"블랙홀에서 온 윌리엄 헌터입니다. '화이트버드호'의 선장입니다."

보트에서 내린 선장이 악수를 청했을 때, 1759년 9월 30일에 난파를 당해 그 무인도1에서 생활해온 '버지니아호'의 유일한 생존자 로빈슨은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178)

 

1787년 12월 22일!

28년이 지났습니다. 로빈슨은, 순식간에 쉰 살이 되어버린 자신의 과거를 헌터 선장 일행이 믿지 않을 것 같아서 당시의 충격으로 기억의 일부를 잃었다면서 난파 시기를 숨깁니다.

 

 

 

유니언 잭2을 단 화이트버드호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감개무량해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마치 숨을 거두기 직전인 것처럼 자신의 전 생애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배의 난파, 탈출을 위한 배 건조와 실패, 비참한 진흙탕 생활, 섬을 개척하기 위한 갖은 노력, 인디언 방드르디3의 출현, 그 인디언에게 강요했던 노동, 화약 폭발 사건과 그로 인한 모든 것들의 파괴, 방드르디의 놀라운 발명과 건전한 놀이 덕분에 예상 외로 '행복하고 감미로웠던 생활'……

그 모든 것이 이제 끝나게 되었구나 싶었습니다.

 

 

 

행복하고 감미로웠던 생활?

방드르디의 실수로 동굴 깊숙이 쌓아놓은 화약이 폭발한 사건은, 그들의 생활을 극적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노예처럼 복종만 하던 방드르디가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그의 원시적 생활에 오히려 자신이 의지하게 되고, 그에게서 신비로운 지식을 얻는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방드르디는 인디언식 음식을 만들어 제공했고, 온갖 사물에 대한 사고 체계도 바꾸어버립니다. 하얀 나비를 "날아다니는 데이지"라고 부르고, 하얗고 둥근 얼룩 모양의 조그마한 자갈을 보여주며 이렇게 묻습니다.

 

'내 말 좀 들어봐. 달이 하늘의 조약돌이야? 아니면 이 작은 조약돌이 모래의 달이야?"(137)

 

로빈슨이 가장 큰 감명을 받는 장면은, 방드르디가 염소들의 왕 '앙도아르'의 가죽으로 연을 만들고, 머리뼈로 악기를 만들었을 때였습니다.

 

방드르디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현이 울릴 수 있도록 머리뼈 양쪽에 독수리 깃을 매어놓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이올로스 하프는 (……) 바람이 없는데도 맑고 가냘프고 구슬픈 소리를 냈다. 방드르디는 오랫동안 이 음악을 들었다. 어찌나 슬프고 감미롭던지 울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짧게 매여 있던 연이 마치 북의 가죽처럼 때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가볍게 흔들리고, 때로는 미친 듯이 퍼덕거리면서 흔들리는 것이었다. 변화무쌍한 달빛 아래서 독수리 깃털의 두 날개는 돌풍이 부는 대로 열렸다 닫혔다 하고 있었다. 공중을 나는 앙도아르와 노래하는 앙도아르가 어둠의 향연 속에서 한 덩어리가 되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저 장중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어찌나 애절한지, 그것은 방드르디를 구하면서 죽은 위대한 숫염소의 탄식과도 같았다.(172~173)

 

 

 

이런 걸 보면 상황은 때로 묘하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로빈슨은 화이트보드호의 선원들이 짐승을 함부로 살육하고 식물을 채취하는 것이 못마땅해 합니다. 행복했던 섬에 무질서와 혼란, 파괴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변질된 서양문화에 충격을 받기도 하고,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강한 양념의 고기를 먹는 일이 고역임을 알게 됩니다.

그는 투명한 초승달이 길을 잃은 채 방황하는 하늘 아래, 금빛 모래의 선과 초록 더미, 바위 들이 두서없이 뒤엉켜 쌓여 있는 섬 스페란차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방드르디는 로빈슨 몰래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화이트보드호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겨서 자신이 노예로 팔리게 될 운명을 눈치채지 못한 것입니다. 그 대신 야안이 동굴에 숨어 있다가 나타납니다. '견습 선원'이라는 이름으로 노예처럼 생활해온 소년입니다. 로빈슨은 기쁨으로 그의 이름을 새로 지어줍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디망슈'(Dimanche 일요일)란다. 축제와 웃음과 놀이의 날이지. 그리고 나에게 너는 언제나 일요일의 아이일 거다."(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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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빈슨 자신이 '스페렌차Speranza(희망)'라고 명명한 섬.
2. 영국 국기.
3.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 나오는 영어 이름 '프라이데이Friday'나 이 책의 불어 이름 '방드르디Vendredi'는 모두 금요일이라는 뜻(이 책 84쪽 주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