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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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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백야》

by 답설재 2016. 6. 22.

F. M. 도스토예프스키 《백야》

이상각 | 인디북, 2009

 

 

 

 

 

 

 

나스첸카, 우리는 그토록 오랜 세월을 헤어졌다가 만난 두 영혼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천 년 전에도 이미 당신을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심정이랍니다. 나스첸카, 어쨌든 나는 오랫동안 누군가를 찾아 헤맸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분명하게 당신을 찾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나도록 되어 있었다는 증거 말입니다.(44)

 

밤이 깊어 헤어져야 할 시각이 다가왔을 때, 서로의 품에 안겨 폭풍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눈썹에서 눈물방울이 흩날리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설움의 격정 속에 잠겨 있던 것은 과연 그녀가 아닐까요? 이런 모습을 한낱 꿈이라고 외면해 버릴 수 있을까요?(51)

 

미모나 성품이나 뛰어난 여성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표현이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그러므로 아마도 평범한 어느 여인이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본 남자가 슬쩍 다가가 곧장 끝도 없는 사랑의 밀어를 퍼붇기 시작한다.

그런지 며칠만에,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는 그 여성도 마침내 사랑을 허락한다.

 

"맞아요. 제가 당신께 하고 싶은 말은…… 제가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아니 사랑했었다…… 그래도 당신이…… 바로 당신의 사랑이 너무나도 커서, 결국 과거의 사랑을 제 가슴속에서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만약 저를 측은하게 생각하신다면, 가련한 소녀를 아무런 위안이나 희망도 없는 운명 속에 버려두고 싶지 않으시다면, 맹세코…… 제 사랑은 머잖아 당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당신은 제 손을 잡아 주실 수 있으세요?"

"나스첸카!"

나는 무서운 감동과 희열에 휩싸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스첸카! 오오, 나스첸카!"(105)

 

 

 

줄거리는 아주 단조롭다. 남자의 사랑의 호소를 다 받아들이고 저렇게 자신의 사랑도 고백한 나스첸카는 옛 사랑이 나타나자마자 그 남자에게로 달려가고 만다.

여인은 그렇게 해놓고도 사랑을 잃은 이 남자에게 보내 자신을 계속 사랑해 달라고 애원한다.

 

(…) 아아, 제발 저를 사랑해 주세요.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저는 이 순간에도 이토록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그만한 가치가 있답니다. 제가 그 사랑에 보답할게요.

저는 다음 주에 그분과 결혼한답니다. 그분은 다시금 사랑하는 사람으로 제게 돌아왔어요. 그분은 저를 잊었던 것이 아니었어요. 그분 이야기를 썼다고 화를 내지는 않겠죠? 그분과 함께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당신은 틀림없이 그분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제발 우리 두 사람을 용서해 주세요. 언제까지나 잊지 마시고, 이 불쌍한 나스첸카를 사랑해 주세요.(115)

 

세상에……

아직 답장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무너진 사랑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변함없는 사랑을 맹세한다.

 

(…) 사랑하는 나스첸카, 나의 마음을 의심하지 말라. 당신 마음속의 하늘이 언제까지나 높고 푸르기를, 당신의 아름다운 미소가 언제까지나 아늑하게 지속되기를 그리고 더없는 기쁨과 행복의 순간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그것은 당신이 다른 한 사람의 고독과 감사에 넘치는 마음에 건네주는 행복이기도 한 것이다. 아아! 더없는 기쁨의 완전한 순간이여. 인간의 기나긴 삶에 있어서, 그것은 결코 부족함이 없는 한순간이 아니겠는가.(118, 끝)

 

 

 

이 서정적인 소설의 여러 부분이 한때 젊은이들의 사랑의 고백, 아무리 설명해도 모자라는 것 같았던 연서(戀書)에 많이 동원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지금은 이렇게 긴 호소를 늘어놓거나 그런 호소를 들을 만큼 인내심이 강한 연인이 있을 것 같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그런 연인들이 왜 없겠는가 싶기도 했다.

 

그런 표현이 필요하다는 젊은이가 있다면 "이런 부분을 패러디하거나 아예 표절해서 쓰면 상대방을 여지없이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밑줄을 그어서 보여줄 수도 있을 텐데…… 아무래도 무용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이 번역본에 함께 실린 또 하나의 소설 『착한 영혼』은 『백야』와 전혀 다른 시각의 작품이었다.

이번에는 너무나 착하고 순수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전당포 주인의 이야기였다.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그의 자격지심, 무모함, 독선 때문에 그 착하고 순수한 여인이 목숨을 잃고 마는 안타까운 이야기.

절대적 사랑과 상대적 사랑? 아니면, 이기적 사랑과 헌신적 사랑? 모르겠다. 이런 건 평론가가 이야기할 주제일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1가 이런 서정적인 소설도 썼구나 싶었다.

16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18세 때에는 권위주의적이었던 아버지가 농노에게 피살당하는 일을 겪은 그는, 공병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할 무렵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848년에는 차르 치하에서 논의 자체가 금지된 사회주의 이론을 연구하는 젊은 지식인 단체에 가입했는데 이듬해에 경찰에 적발되어 구성원 모두 체포되었고 그도 총살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 직전에 황제 특사로 풀려나 시베리아 옴스크로 유배된 적도 있다.2 이 소설 『백야』는 그 와중에 발표된 작품이었다.

어느 간교한 출판업자와 단시간 내에 새로운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하지 못하면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넘기기로 합의한 적도 있다. 이때 그는 룰렛에 대한 열정을 토대로 『노름꾼』을 썼다. 마감 시간이 촉박해지자 속기사 안나 스니트키나(19세)를 고용했는데, 그녀는 폐렴으로 아내를 잃은 그에게 현숙한 아내, 문학적 동료가 되었다.

기구한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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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
  2. 작품 해설 중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