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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懲毖錄》

by 답설재 2016. 6. 17.






柳成龍懲毖錄》

李民樹 역, 을유문화사 1992(초판17쇄)1












    자서(自序)


  <징비록(懲毖錄)>이란 무엇인가. 임진란 뒤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에 간혹, 난 이전의 일까지 섞여 있는 것은 난의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생각하면 임진의 화(禍)야말로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십여 일 동안에 세 도읍(서울·개성·평양―역자주)이 함락되었고, 온 나라가 모두 무너졌다. 이로 인하여 임금은 마침내 파천(播遷)까지 했다.

  그러고도 오늘날이 있다는 것은 진정 하늘이 도운 게 아니라고 누가 말하겠는가.

  바꿔 생각하면 이것은 또한 조종(祖宗)의 어지신 은덕이 넓게 우리들 백성에게 미쳤던 것이기도 하다.

  백성의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은 그치지 않았고, 또 임금의 사대(事大)하는 마음이 명나라 황제를 감동시켰다.

  이래서 중국은 몇 번이나 구원의 군사를 내보냈던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으면 필경 나라가 위태로왔을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지나간 일을 징계(懲)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毖)노라.」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징비록>을 쓰는 연유라 하겠다.

  나같이 못난 몸이 당시의 국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감히 나라의 중한 책임을 맡아가지고, 위태로움을 바로잡지도 못했고, 또 기울어지는 형세를 붙들지도 못했다.

  생각하면 그 죄, 몸이 죽어도 다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오히려 산 속에 목숨을 붙여 성명(性命)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 어찌 임금의 너그러우신 은덕이 아닐까보냐!

  걱정스럽던 일이 겨우 가라앉으매 지난 일을 생각해본다. 새삼스럽게 황송하고 부끄러워 낯을 들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에 한가로운 틈을 타서 지난날에 내 귀로 듣고, 내 눈으로 본 중에서 임진년으로부터 무술년에 이르기까지의 몇 가지 일을 기록한다. 또 장계(狀啓)·상소(上疏)·차자(箚子)와 문이(文移)·잡록(雜錄)을 그 밑에 붙였다. 이것이 비록 보잘것없다고 하더라도 모두 당시의 사적(事蹟)들임에는 틀림없으므로, 이 또한 허술히 여길 수는 없는 것들이다.

  이제 전야(田野)에 숨어서 나라와 임금에 충성하는 생각으로, 내가 과거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한없는 죄를 기록하는 바이다.







  굳이 "임금의 사대하는 마음" 같은 부끄러운 시대상이 나타난 부분을 문제삼을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2 꼭 그렇게 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이야기할 것 없이 아예 오늘까지의 우리 역사를 이야기하자는 제안이 떳떳할 것이다.


  오로지 "임진의 화(禍)야말로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 "그러고도 오늘날이 있다는 것은 진정 하늘이 도운 것", "지나간 일을 징계(懲)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毖)한다"는 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 충분할 온갖 이야기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전쟁에 대한 어설프고 어수룩한 대비, 무방비, 그런 와중에서도 벌어지는 관리들의 부정부패, 정의로운 인재의 억울한 죽음, 흉흉한 민심, 용감무쌍한 장수와 도망다니는 장수, 그보다도 못한 관리, 싸울 의지도 없으면서 오히려 정의로운 지도자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관리와 장수, 명나라 장수의 머뭇거림과 기피, 지지부진한 이동, 조선에 대한 행패, 일본과의 강화 의지, 연이은 패전, 백성들의 참혹한 죽음, 굶주림……


  그럼에도 어디에나 의병이 있었고,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일관한 관리와 장수도 있었고, 누구보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류성룡의 재능은 고난 속의 지혜로도 빛났지만, 이러한 인물들, 사건들에 대한 기록도 놀라운 것이었다. 실명이 기록되어 있어 싫어 할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징비록》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으로 끝나고 있다.


  교사라면 이 책이 국보라는 걸 가르치기보다는―그게 교육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이렇게 끝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도, 그렇게 한 이유, 그 의미 같은 걸 '설명'하지는 말고 '토론'하게 하면 좋겠다.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이 나라 교육이지만, 도대체 뭘 설명하겠는가. 그렇게 설명으로 일관하니까 나중에 어른이 되면 자신의 말만 해대고 남의 말은 듣지 않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토론다운 토론이 거의 부재하는 나라가 되어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통제사로 있을 때 주야로 마음을 스스로 단속하여 갑옷을 벗은 일이 없었다.

  견내량(見乃梁)에서 적과 상치한 지 오래되던 어느날 밤, 배는 모두 닻을 내리고 달밤은 낮과 같은데, 그는 갑옷을 입은 채 북을 베고 잠시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좌우를 불러 소주를 가져오라 했다.

  그는 술 한 잔을 따라 마시더니 제장들을 불러오라 했다.

  『오늘밤 달이 이렇듯 밝으니 필시 적병이 간계를 부릴 듯하다. 달이 없는 날이면 반드시 우리를 엄습해 왔으니 이렇게 달이 유난히 밝은 날도 공격해 올 듯싶다. 제장들은 각별히 경비하여 소루(疏漏)함이 없도록 하라.』

  이에 호령의 나팔을 불어 모든 배의 닻을 올리게 하고 또 척후를 시켜 적정(敵情)을 살피라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척후가 급히 와서 보고했다.

  『적들이 진격해 옵니다.』

  이때 달은 서산에 걸려 산 그림자가 바닷속에 거꾸로 있어 그곳은 약간 어두웠다. 그 위를 적선이 새까맣게 덮쳐 오고 있었다.

  이것을 기다리고 있던 이순신의 군사는 적선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일제히 대포를 쏘고 함성을 올리니 아군의 여러 배가 모두 이에 호응했다.

  적은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더 접근치 못한 채 일시 조총을 쏘았으나, 소리만 바다 속에 진동할 뿐 탄환은 모두 물 위에 비처럼 떨어졌다. 드디어 적들은 감히 범하지 못하고 패해 돌아갔다. 이것을 보고 제장들은 모두 그를 신(神)이라 했다.3







  이순신은 세 나라 군대를 '상대'하였다. 고민의 대상은 실로 세 나라의 군대였다. 어느 경우나 '가장' 어려운 경우여서 오늘날 우리에게 교육적·군사적·외교적으로 절체절명이라는 것의 교훈이 되어야 하는 것도 확실하다.


  더구나 명나라 군대는 현실적으로 우리 군대나 왜적에 비해 오히려 더 어려운 연구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중국 장수 수병 도독(水兵都督) 진인(陳璘)이 왔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고금도에서 이순신과 합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품이 사나와서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

  임금이 청파(靑坡)의 들까지 나와 진인을 전송할 때 나도 나가 보았지만, 그는 수령을 패고 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끈으로 찰방(察訪) 이상규(李尙規)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에 피가 낭자했다. 나는 급히 역관(譯官)을 시켜 이를 말리도록 했으나 종시 듣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같이 앉았던 재상들을 보고 탄식했다.

  『허허, 이번 싸움에 이순신의 군사가 또 패하겠구나. 진인과 같이 군중에 있으면 자연히 장수의 권리를 잃을 것이니, 저렇듯 군사들에게 횡포하고서야 그 군사가 패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말을 듣던 다른 여러 사람들도 내 말을 옳게 여겨 탄식해 마지 않았다.

  한편 이순산은 진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시켜 물고기를 낚고 돼지와 사슴을 잡아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장만해놓고 그를 맞이했다.

  진인의 배가 도착하매 순신은 군의(軍儀)를 갖추어 멀리 나가 그를 맞고, 그 군사들을 크게 대접하니 제장들과 이하 군사들이 취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사졸들은 모두 이순신을 가리켜,

  『과연 참 양장(良將)이로다.』

하고 칭송해 마지 않았고, 진인도 마음이 흐뭇한 모양이었다.

  진인이 온 지 얼마 안 되어 적병이 와서 근처 섬을 침범했다. 이순신은 즉시 군사를 보내어 이를 파하고 적병 四十명의 머리를 베어 왔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전공을 모두 진인에게로 돌렸다. 진인은 마음 속으로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그는 이순신을 어렵게 여겼다. 모든 일을 일일이 이순신에게 물어서 처리했고, 출입하는 데에도 이순신과 나란히 교자를 타고 다녔지 감히 앞서 가지 못했다. 이에 이순신은 진인과 약속하여 중국 군사와 우리 군사는 조금도 다름이 없는 처지이니, 만일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누를 끼치는 자가 있으면 용서없이 엄벌키로 했다. 이로부터 섬 속의 규율이 잡히고 질서가 섰다.

  이것을 본 진인은 임금께 글을 올렸다.

  『통제사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이 있읍니다.』

  이렇듯 진인이 이순신을 칭찬한 것은 그에게 감복하였기 때문이다.(214~216)







  《징비록》은 왜적의 침략을 막지 못한 참회록, 반성문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어떤 고난을 겪게 되는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짓을 하게 되는지, 그로 인한 어려움은 어떤 것인지 다 보여주었다.


  이 책으로써 우리는 전쟁의 참화 속에 우리 민족이 그 굴욕을 어떻게 맞이했는지, 그 과정에서의 조마조마함과 답답함을 실제처럼 경험할 수 있다.


  조선(우리 조상들)은 이 '반성문'을 전쟁의 종료와 함께 곧 잊고 말았다. 임진왜란으로부터 40년, 병자호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다시 한번 굴욕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고스란히 증명해주었다.





  시진핑(習近平) 당시 중국 부주석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국무총리 주최 환영 만찬에서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명(明)과 원군 교섭을 벌인 일화가 화제가 되었지만 시 부주석은 그 역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고, 이튿날 류성룡의 후손인 어느 장관이 시 부주석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장관은 어떤 의미로 이 책을 선물했을지, 두고두고 그 기사가 잊혀지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임진왜란 당시와 어떤 점이 같고 다른지, 또 지금 누가 이 책을 읽고 있는지,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내가 이 책을 선물한다면 상대방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것도 생각해보았다.

  ① 잘난 체 하기는……

  ② 꼰대4는 어쩔 수 없다니까?

  ③ 이런 책이 다 있다니! 잘 읽어봐야지!

  ④ 요즘에도 책을 선물하는 사람이 있구나.

  ⑤ 이게 뭐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한데……

  ⑥ (                                                     )







  1. 포켓판, 그리고 아무래도 읽기에 불편한 세로쓰기 책. [본문으로]
  2. 심지어 본문에는 이런 내용도 보였습니다...'당시 우리나라 사신은 연달아 요동에 들어가 사태가 급함을 알리고 구원병을 청했으며 또 중국에 합병할 것을 청했던 것이다. 그때 생각으로는 적병이 평양을 함락시키고 보니 그 형세가 강대해서 금시에 압록강까지 치밀어올라올 것 같았다. 그래서 이같이 위급한 사태가 없다고 하여 중국에 합병하려고까지 했던 것이다.(111) [본문으로]
  3. 225~226쪽(징비록 끝부분). [본문으로]
  4. 1. 학생들의 은어로, ‘선생(先生)’을 이르는 말. 2. 학생들의 은어로, ‘아버지’를 이르는 말. 3. 학생들의 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 (DAUM 백과사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