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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오한기 《의인법擬人法》

by 답설재 2016. 6. 24.

오한기 소설집 《의인법擬人法

현대문학 2015

 

 

 

 

 

 

 

「파라솔이 접힌 오후」

 

컨트리 가수 W의 종적을 찾는 서점 주인 이야기.

W는 권총으로 자살했는데 지갑에서 발견된 쪽지에 "죽음도 내가 원한 건 아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W의 평전 『파라솔이 접힌 오후』를 집필한 브라운맨은 W를 죽인 건 사람들의 무관심이었고, W는 죽으면서까지 관심을 받고 싶어 했던 애정 결핍증 환자였다고 했지만, '나'는 중얼거린다. 'W에게 평화나 폭력은 같은 의미'라고, 그가 죽은 건 '파라솔을 빼았겼기 때문'이라고.1

 

「더 웬즈데이」

 

이렇게 시작된다.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는 경기도 성남의 컴컴한 모텔 방에서 민수라는 여배우와 성관계를 갖던 도중 사망했다. 주간지 『더 웬즈데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사실들을 세세하게 가르쳐주었다.(43)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는 잘생긴 서부의 영웅이었고 행동 하나 하나에 멋이 밴 강력계 형사였다. 아카데미를 휩쓴 영화감독이었으며 모범적인 공화당원이기도 했다. 1986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카멜 시 시장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그는 부정부패를 척결한 뒤 미련 없이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여러모로 완벽한 남자였다.(75)

 

잡지사를 그만두고 위암에 걸린 숙부를 대신해 펜션과 낚시터를 관리하는 화자(話者) 앞에 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타난다.2

 

「유리」

 

주간지 기자 출신인 '나'는, 전처 결혼식에 가려고 파리로 가는 중에 킬러 유리를 만나고, 전처의 약혼자 '시몽'과 다툰 나는 그가 살해 당한 후 그 전처를 만나 귀국한다.3

인상 깊은 걸 소개해보라면, 주간지 『메시노프』 편집장이 주문하는 것이다. 그의 주문은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오스트리아 정부의 공로패를 거부하면서 한 말("사람이 죽음을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웃기는 일이다.")을 살인범 마크 에블스가 감옥에서 쓴 일기의 한 문장으로 바꾸어버리는 것, "야하게 쓰면 더 좋고." 정도이다.

「햄버거들」

 

사장의 자서전을 쓰고 있는 '나'는 시를 쓰는 한상경과 동거하고 있다. 문학적 고뇌를 앓던 한상경은 어느 날 돌연 햄버거와 문학을 연결 짓고 햄버거 예찬론자가 된다.4

한상경은 햄버거에 중독된 작가들을 찾아나서는데, 어느새 나도 햄버거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게 된다. 햄버거들…

「볼티모어의 벌목공들」

 

'지의류의 보호 본능에 대한 적격 판단'을 연구하는 식물학자가, 볼티모어에 들어가 그 섬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노인과 함께 생활하며 겪은 일들.

수십 명의 프리부츠 숲 벌목공들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어간다.

「열네 살」

 

야영장 주인 한상경5에게, 도시락을 제공하고 잠자리를 제공받는 열네 살짜리 배달꾼 이야기.

「유리」에서 킬러 역이던 알렉세이 유리비치가 여기에서는 백화점 공사장 러시아 출신 인부로 나와 이 순정파 열네 살짜리 소년이 사랑하는 몸 파는 누나 제이니를 죽이는 살인범이 된다.

 

「의인법」

 

병신들, 내 책을 읽으며 시간 낭비를 하느니 호모하고 빠구리를 뜨는 게 훨씬 나을 걸.

부코스키는 저승에서 추종자들을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246)

 

곰팡이가 피었네요.

진료비를 낼 때 간호사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관점에 따라 예쁘다면 예쁘고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못생겼다면 못생긴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나를 비웃는 거 같아 약이 올랐다. 그녀는 자신도 곰팡이가 난 적이 있다면서 곰팡이는 생각보다 흔한 피부병이라고 했다. 난 어디에 곰팡이가 피었었냐고 물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해줄 수 없는 은밀한 부위라고 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몸에 곰팡이가 핀 상상을 했고, 그들이 스스로 아메바라는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장면을 떠올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텔레파시라도 통했는지 내 앞에 있는 아메바도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미지였다.

 

한상경을 다시 만난 건 미지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254)

 

「새해」

 

소설가의 일상?6 가령, 이렇다.7

 

(    ) 납치나 해볼까

이 문장은 괄호 안에 '달리 할 일도 없는데'나 '심심한데' 같은 구절을 생략한 것일 수도 있다. '날씨도 흐린데'나 '배가 너무 고픈데'라는 구절도 괄호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오늘 화가 좀 나는데'라는 구절도 들어갈 수 있다. '돈벌이나 할 겸' '담배를 피우는 대신' '저 여자가 마음에 드는데' …… 이렇게 끝도 없이 만들 수 있다. 몇 번 해보니까 꽤 재미있었다. 이 생각이 떠오른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겨졌다. 그런 김에 몇 문장 더 생각해냈다.

 

(물구나무도 섰는데) 납치나 해볼까

(스파게티를 먹은 김에) 납치나 해볼까

(저 개구리처럼 생긴 작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납치나 해볼까 (279~280)

 

이게 소설이다. 뭘 가르쳐 주려고 들지 않고 재미있고 편하다.8

등장 인물들은 덜 떨어진 상태이거나 한심하기도 하지만 간단하진 않다.

 

오한기의 인물들은 인간됨의 문턱에서 번번이 실패하고 그렇기에 계속해서 소설을 씁니다. 소설을 써야 사는데 소설을 써도 인간이 될 수 없으니 거듭해서 쓸 수밖에요. 소설기계. 이것은 오한기의 영구동력입니다. (…) 나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떠오른 또 하나의 의인법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오한기의 등장인물들이 각각 내면의 기제를 의인화한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이를테면 유리. 볼티모어의 노인. 미지. 아내. 그들은 자기검열을 형상화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한상경. 그는 오한기의 자기혐오 그 자체다!

- 금정연 「오한기에서 오한기로From Hanki to Hanki―정지돈과 함께한 화요일」(해설) 중에서.9

 

이렇게 적어놓은 걸 오한기가 보면 무슨 짓이냐고, 왜 엉뚱한 이야기를 부질없이 늘어놓았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내 나이를 알게 되면,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짓이라고 생각지 않느냐고,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언제까지 이런 짓이나 하고 있을 거냐고 물을 것 같아서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하다.

 

매사에 좀 늦은 편이어서 아직 노인 행세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변명을 하겠지만 '내가 정말 이제 스스로 뭔가 결정해야 할 단계가 아닌가' 싶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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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카렌토증후군 환자는 자신을 극도로 혐오해요. 그러다가 대인기피증에 걸리거나 폭력적으로 돌변하죠.'(36). 강한 햇살 속에서 W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W는 자취를 감추고 다시 파라솔 아래 숨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꾸 W의 파라솔을 빼앗으려고 했다. 브라운맨은 이렇게 서술했다(37).
2.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든 것, 그를 둘러싼 영화예술의 흐름을 설명할 수 없다면 아무리 추락한 배우라 할지라도 그렇게 나타나 줄 리 없을 것이다.
3. 언젠가 《현대문학》에서 읽은 적이 있다.
4. '하긴 이런 시인이 많긴 하지' 하고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시를 쓰는 수많은 요즘 시인들을 떠올렸다.
5. 이 작가는 걸핏하면 한상경을 등장시킨다. 그것도 재미있다. 한상경은 다음에는 또 어떻게 태어나 어떤 일을 하게 될까?
6. 그러고보니까 매번 소설가 이야기나 나오고 한상경이라는 인물도 거의 그렇다.
7. 그러니까 소설가가 하는일도 이렇다고 짐작하면 될 것 같다.
8. 두어 달 전 『현대문학』에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게 하는 대담이 실렸었다.
9. 3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