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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로제 그르니에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 Les Larmes D'Ulysse』

by 답설재 2016. 6. 13.

로제 그르니에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 Les Larmes D'Ulysse』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2002

 

 

 

 

 

 

율리시즈라는 이름을 가진 개는 많다. 그렇지만 정작 율리시즈 자신의 개는 이름이 무엇이었던가? 아르고스. 그 개는 페넬로페보다 더 딱한 처지에 놓인 채 주인을 기다린다. 언제나 신중한 이 이타카의 왕은 오랜 순항 끝에 마침내 자신의 조국인 섬나라로 돌아오자 아테나와 몰래 짜고서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한다. 그렇지만 애견 아르고스는 그를 단박에 알아본다.

 

이제 주인이 집을 떠나고 없는지라 아무도 돌보지 않게 된 개는 대문 앞, 노새와 소들이 배설한 거름더미 위에 퍼질러 누워 있었다. 율리시즈의 하인들은 드넓은 영지의 땅에 시비할 거름을 푸러 찾아오곤 했다. 아르고스는 거기서 이가 뜰끓는 몸을 눕히고 잠을 잔다. 개는 찾아온 사내가 율리시즈라는 것을 금새 알아차리고 꼬리를 흔들었지만 두 귀가 축 늘어진 채 일어서지 못했다. 기진맥진하여 주인에게 다가갈 힘이 없는 것이었다.
율리시즈가 개를 보았다. 그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신들이 다 그렇듯이, 복수심이 강한 포세이돈이 사납게 달려들어도 끄떡도 하지 않던 율리시즈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한 것은 오직 그의 늙은 개뿐이었다.

 

1) 저자 로제 그르니에 씨가 지금 살고 있는 파리의 바크가街 81번지 집에서 키우던 포인터의 이름이 '율리시즈'였다. 프랑스말로는 물론 '윌리스'라고 발음되지만 우리 말로 더 익숙한 '율리시즈'로 표기하기로 한다. 윌리스는 이제 세상에 없다.

 

머리말, '율리시즈'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

릴케, 까뮈, 로멩 가리, 버지니아 울프 같은 숱한 작가·명사들과 개, 문학에 관한 에세이들을 엮은 책이다. 위의 머리말도 그 중 한 편이다.

 

머리말 불가사의 개로 태어나 사는 것의 어려움 원망하는 눈빛 냄새의 세계 낙오한 개들 개들의 천국 과거를 가진 개 플로베르의 왕뱀과 앵무새 바크 거리로의 산책 사랑받는다는 것 개가 좋긴 하지만…… 동물의 친구들 우리의 위인들 영웅들과 망명자들 라르보, 혹은 부르주아 특유의 어처구니없는 짓들 동일시同一視 소명召命 환상, 상징, 신호로서의 개 형이상학 볼테르 대 루소 우등생 명단 동물―기계 모데스틴느 가스통 페뷔스 두 사냥꾼 짐승 같은 사람들 동구東歐에서는 옥시아스섬 원수들 진화 어휘의 문제 개의 마음 율리시즈가 죽고 난 뒤에 꾼 꿈들 플러쉬 괴링의 개의 약혼녀 순수한 사랑 염세주의자 개와 고양이 앙다이유의 밤 덕을 보는 사람들 크노의 개 디노 말, 염소, 개 책과 개

 

소제목들 하나하나를 봐서는 어떤 이야기일지 그 내용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지만 모아놓은 목록은 무언가 엿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덕을 보는 사람들」(151쪽)은 단 6행인 에세이(더 짧은 에세이도 있다). 제목('덕을 보는 사람들')을 보고 어떤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읽었고, 이번에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현된 이야기여서 또 당혹감을 느꼈다.

 

결국, 몇몇 예외가 없지 않지만, '문인'들은 대개 동물에 봉사하기보다는 동물을 이용하는 편이다. 사람과 동물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신세를 지는 쪽은 항상 사람이다. 세상에는 주정뱅이, 악한, 바보 등 폐기처분된 인간들이 있다. 아무도 그들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직 개만이 그런 쓰레기같이 된 이들을 열심히 따라다니며 복종하고 사랑한다. 거리를 떠도는 얼마나 많은 노숙자들이 개를 이용하여 행인의 동정심을 사고 보다 쉽게 동전을 얻는가.150) 하기야 그들 역시 자기를 따라다니는 그 친구를 나름대로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50) 그뿐이 아니다. 덩치 큰 개와 같이 자면 매우 따뜻하다. 노숙자들에게 살아 있는 난방기구로 이보다 더 충실한 것이 더 있겠는가? 그래서 파리의 거리에 주저앉아 있는 이른바 클로샤르(거지)들 곁에는 큼직한 개들이 엎드려 있다.

 

읽을 때의 정서에 따라 눈물을 글썽거리게 될 내용도 많다(두 가지 예).

릴케가 개에 관하여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를 선보이는 곳은 바로 《말테 라우리드 브리게의 수기》다. 말테의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젊은 여자 잉에보르그가 죽어서 땅에 묻힌 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그녀가 기르던 개 카발리에는 식구들이 테라스에 나 앉아 차를 마시는 시간이 되자 마치 그 잉에보르그가 다시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한 듯 그녀를 맞아들이려고 뛰쳐나갔다. 개는 펄쩍펄쩍 뛰며 빙빙 돌기 시작했고 (…)1

1980년 9월 어느 날, 우리는 가리를 바로 그가 사는 집 건물 앞에서 만났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말했다.  ―이리 와바. 바보야!  우리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로멩에게 말했다.  ―자네가 율리시즈를 만나는 것도 이게 마지막인 것 같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어.  로멩 가리는 갑자기 격렬한 울음을 터뜨리며 자기 집 처마 밑으로 가서 숨었다.  율리시즈는 9월 23일에 죽었고 가리는 12월 2일에 죽었다.  일년 사이에 진 세버그, 가리, 그리고 율리시즈가 세상을 떠났고 우리의 길이 텅 비어버렸다.
2

 

이런 글을 보면 가령 "개 같은 놈!"이란 인간 수컷의 특별한 기능에 대한 비난은 그렇다 쳐도 "개만도 못한 놈!"이란 행동에 대한 비난은 좀 잘못된 해석이 아닐까 싶었다. 미즈바야시 아키라의 『멜로디』에 이어서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인지 읽는 내내 '개는 오히려 사람 같지는 않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다.

 

몇 군데만 보면, '정말로 사람 같지는 않은' 그 '벌거벗은 자아'(『멜로디』 248~249), 우정과 사랑(93), 인간 사회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절대적으로 '순수한' 사랑(138), 진정성, 바른 생각, 판단력…… 이럴 것 없이 '사람 같지 않은' 점(94)……

 

《"아름다운 책" 그리고 "개에 대한 명상집"》
미즈바야시 아키라는 "아름다운 책"이라고 했고,3 로제 그르니에 자신은 "개에 대한 명상집"이라고 했다.4

 

이 번역본 제목은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인데 비해 원제는 『율리시즈의 눈물』, 미국 시카고대학 출판부의 번역본 제목은 『The difficulty of being a dog』.
2002년에 나온 책이지만 초판(1쇄)이어서인지5 여러 곳에서 오탈자가 눈에 띄었다.6

 

번역자가 붙인 157개의 재미있고 친절한 주(註)를 눈여겨보았다. 번역자의 생각, 경험, 정보 등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큰 도움이 되면서도 때로는 로제 그르니에가 하는 이야기를 번역자의 이야기로 착각하기도 했다.

 

 

  1. 21쪽,'원망하는 눈빛'중에서. [본문으로]
  2. 42~43쪽, '바크 거리로의 산책' 중에서. [본문으로]
  3. 『멜로디』 179쪽. [본문으로]
  4. 176쪽, 인터뷰 '로제 그르니에와의 만남' [본문으로]
  5. 애완견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이런 책쯤은 기본으로 읽는 줄 알았다. [본문으로]
  6. 가령 '맥 세넷나 채플린의 영화들에서 개가 자아내는 온갖 개그의 원조를 찾고 싶다면...'(30쪽)이라는 문장의 '맥 세넷나'를 '맥 세넷이나'로 짐작하는 건 무모한 용기 같아서 조심스럽고 정말 그런지 의심스럽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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