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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한강 『채식주의자』

by 답설재 2016. 6. 8.

한강1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창비, 2016(초판28쇄)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고 도저히 고기를 먹을 수 없게 하는 꿈2을 꾸었다. 그렇지만 최소한 '채식주의자'가 아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듯한 세상에서 남편은 물론 그 누구도 그녀의 '채식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피폐해진다.(「채식주의자」).

 

미술을 하는 형부(언니 인혜의 남편)의 예술혼이 그 '채식주의자'를 대상으로 하여 불붙게 된다. 아내로부터 영혜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말을 들은 다음이었다.3 두 사람은 몸에 꽃을 그리고 그 '꽃들의 교합'인양 영혼을 불태운다.4 '몰상식'한 일을 벌인 남녀니까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밀려나게 된다(「몽고반점」).

 

남편을 버린 인혜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동생 영혜를 정신병원에 맡겨놓는다. '채식주의자'는 단지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에 한없이 피폐해져간다(「나무 불꽃」)

 

세 편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소설의 줄거리라고 적어봤다.

「채식주의자」가 제일 좋고, 그 다음이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었다. 잘못 읽었을 수도 있다.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끌리지도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 각질이 일어난 노르스름한 피부, 외꺼풀 눈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개성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림, 가장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구두를 신고 그녀는 내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힘있지도, 가냘프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신선함이나 재치, 세련된 면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무난한 성격이 나에게는 편안했다. 굳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박식한 척할 필요가 없었고,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허둥대지 않아도 되었으며, 패션 카탈로그에 나오는 남자들과 스스로를 비교해 위축될 까닭도 없었다. 이십대 중반부터 나오기 시작한 아랫배, 노력해도 근육이 붙지 않는 가느다란 다리와 팔뚝, 남모를 열등감의 원인이었던 작은 성기까지, 그녀에게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9~10)

 

이렇게 시작된다. 빼고 싶거나 더하고 싶은 단어가 없고, 번역본을 읽을 때 느끼는 어색함도 없다. 그러니까 윤문을 하며 읽을 필요가 없다.

호기심으로 인한 긴장감이 끊어지지 않았고, 가령 "남모를 열등감의 원인이었던 작은 성기까지"처럼 필요할 때마다 능청스러웠다. 그 능청이 억지스럽거나 조잡하지 않아서 편했다.

 

"여보세요?"

콧소리를 섞어 내는 처형과의 통화는 언제나 나에게 약간의 성적인 긴장감을 주었다.(36)

 

 

 

채식주의를 고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분명했다.

 

이제는 오분 이상 잠들지 못해. 설핏 의식이 나가자마자 꿈이야. 아니, 꿈이라고 할 수도 없어. 짧은 장면들이 단속적으로 덮쳐와.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피의 형상, 파헤쳐진 두개골, 그리고 다시 맹수의 눈. 내 뱃속에서 올라온 것 같은 눈. 떨면서 눈을 뜨면 내 손을 확인해.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_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 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43)_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191~192)

 

그녀는 덩굴처럼 알몸으로 얽혀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분명히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성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꽃과 잎사귀, 푸른 줄기 들로 뒤덮인 그들의 몸은 마치 더이상 사람이 아닌 듯 낯설었다. 그들은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218)

 

다만 소름끼칠 만큼 담담한 진실의 감각으로 느낄 뿐이다. 그5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219~220)

 

이렇게 생각했다.

'채식주의자는 어떤 사람인가?'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모두 비채식주의자인가?'

'그 채식주의자만 빼면 모두 동일한 특성을 가진 비채식주의자들인가?'

 

'비(非)채식주의자'들은 한 명의 '채식주의자'를 놓고 폭력을 행사한다. 폭력은 당연히 무섭다.

 

 

 

온갖 종류의 '채식주의자'가 있는 곳, 온갖 종류의 '비채식주의자'가 있는 곳이 이 세상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비채식주의자들'이 필요하고, 그런 정치가, 그런 종교인, 그런 교육자, 그런 부모, 그런 이웃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양함으로 이 세상은 아름다워질 수 있고, 그걸 인정할 수 있어야 행복한 세상일 것이다.

 

교사였으니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교사는 자신이 '비채식주의자'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런(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비채식주의자'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는 비채식주의자들이 행사(제공)하는 교육은 단순하고 위험한, 유치하고 무서운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런 교육은 폭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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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가,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만해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재직중이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내 여자의 열매』『노랑무늬영원』, 장편소설 『검은 사슴』『그대의 차가운 손』『바람이 분다, 가라』『희랍어 시간』『소년이 온다』, 산문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등이 있다....... 『채식주의자』는 “탄탄하고 정교하며 충격적인 작품으로, 독자들의 마음에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꿈에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라는 평을 받으며 한국인 최초로 2016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다(책 날개에 소개된 작가 이력 사항)
2. (...) '오싹하고, 더럽고, 끔찍하고 잔인한 느낌만이 남아 있어.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느낌. 아니면 누군가 나를 살해한 느낌. 겪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할...... 단호하고, 환멸스러운, 덜 식은 피처럼 미지근한.(...)'(37쪽 본문)
3. 그가 처제를 달리 생각하게 된 것은 분명히 아내에게서 몽고만점에 대한 말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 그는 조금도 처제에게 딴마음을 품을 적이 없었다. 처제가 그의 집에 있는 동안 보였던 행동들을 기억할 때 그의 몸에서 치밀어오르는 관능은 추체험에 불과한 것이었다. 베란다에서 손을 활짝 별려 그림자를 만드는 그녀의 넋잃은 모습, 그의 아들을 씻길 때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 아래로 드러나던 흰 발목, 방심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모습, 반쯤 벌린 다리, 흐트러진 머리칼을 기억할 때마다 그의 몸은 뜨거워졌다. 그 모든 기억 위로 푸른 빛 몽고반점이 찍혀 있었다.(87쪽 본문)
4. 영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작고 파릇한 몽고반점이 남편에게 어떤 영감이라는 것을 주었는지 그녀는 알고 싶지 않다. 그 가을 아침 영혜에게 줄 나물을 싸들고 자췻방을 찾았을 때 그녀가 본 광경은 상식과 이해의 용량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전날 밤 자신과 영혜의 나신에 울긋불긋한 꽃을 가득 그리고는 몸을 섞는 장면들을 테이프에 담았던 것이다.(167쪽 본문)
5. 남편(영혜의 몽고반점으로 영혼을 불태운 인혜의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