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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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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한 명』(抄)

by 답설재 2016. 5. 7.

  김숨 『한 명』(抄)

『현대문학』 장편연재소설

 

 

 

   소녀상(2012.9.26)

 

 

 

투명한 유리잔 속 우유를 그녀가 바라보기만 하자 옷수선가게 여자가 마시라고 재촉한다.

"우유를 먹으면 소화가 안 돼서."

우유를 보면 남자 정액 생각이 나서³⁰⁾라고 차마 말할 수 없어 그녀는 그렇게 둘러댄다.

정액을 삼키라고 했지.³¹⁾

나이가 지긋한 장교였다. 술에 잔뜩 취해 방으로 들어와서는 송진처럼 달라붙었다. 그녀가 발로 차면서 거부하자 군복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더니 다다미에 꽂았다. 다다미에는 단도로 찍은 칼자국이 누렇게 시들어 떨어진 솔잎처럼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소녀들은 일본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권총으로 아래를 쏘기도 했으니까.

권총 방아쇠를 당길 때 그들은 총구멍이 겨누는 곳이, 자신들은 물론 모든 인간이 빚어지는 곳이라는 걸 깜빡했을까.

어느 날 장교가 총으로 그녀보다 두 살인가 세 살인가 더 나이가 많은 소녀의 아래를 쐈다. 소녀가 매를 맞으면서도 반항을 하니까. 실신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반항을 하니까. 총은 자궁을 뚫고 나갔다. 죽지는 않았지만 소녀의 아래는 호박처럼 막 썩어들었다.³²⁾

정액을 삼킬 때 오죽하면 똥을 먹는 게 낫다³³⁾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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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윤두리(1928년 출생),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울, 1993.

31) 황금주(1922년 출생), 『일제강점기』, 박도 엮음, 눈빛, 2010.

32) 황금주, 『일제강점기』·윤순만,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두 분 할머니의 증언 내용을 토대로 작가가 소설적으로 재구성했음.

33) 황금주, 『일제강점기』

 

 

 

 

소설가 김 숨(사진 출처: 문화저널 21, 20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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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숨 1974년 울산 출생. 1997년 『대전일보』, 1998년 『문학동네』 등단. 소설집 『투견』 『침대』 『간과 쓸개』 『국수』 장편소설 『백치들』 『철』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 『물』 『노란 개를 버리러』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바느질하는 여자』.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수상.

 

 

 

2016년 3월호, 79~80쪽에서 옮김. 2016년 1월호부터 제5회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