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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사랑도 배워야 할 수 있다

by 답설재 2017. 7. 31.

 

 

 "가엾은 폴! 이렇게 늦은 나이에 수도승처럼 살다가 이제는 마음까지 편치 않다니!

애를 돌보려 하다니 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에요! 추상적으로는 어린 드라고를 사랑하고 싶겠죠. 하지만 현실이 그걸 계속 가로막는 거예요. 폴, 우리는 의미만 갖고서는 사랑할 수 없어요. 우리는 배워야 해요. 영혼들이 높은 곳에서 내려와 다시 태어나겠다고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예요. 우리와 벗하며 커가면서, 사랑의 어려운 길을 따라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죠. 처음부터 당신은 천사와 같은 뭔가를 드라고에게서 보았죠. 당신이 틀린 건 아니에요. 드라고는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더 오랫동안, 세속을 벗어난 본질과 맞닿아 있었어요. 당신의 실망감과 노여움을 극복하세요. 가능할 때 드라고에게서 배우세요. 조만간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영광의 마지막 가닥이 허공으로 사라지고, 그는 그저 우리 중 하나가 될 테니까요."

 

 

소설 『슬로우 맨』에서 한쪽 다리를 절단당하여 불구자가 된 레이먼트는, 사랑하는 간호사 마리야나의 아들 드라고에게서 '천사'를 발견했으나 곧 실망하게 된다. 그 모습을 보고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한 말.

나는 이 대문만으로도 이 소설, 이 작가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손자와 함께 지낸다. 녀석은 어린이집은 가지 않고 내년에 유치원에 가겠다고 주장한다.

나는 교육자였고, 이후에도 그 주제를 잊지 않고 있으므로 한 명쯤은 가소로워하며 덤벼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사사건건' 대결이었다.

 

드디어 매우 지쳤을 즈음, 이렇게 해서 어떻게 하나 싶어서 까짓 거 다 포기하듯 하자는 대로 하기로 마음먹자마자, 그만 온 세상이 편안해졌다.

나로서는 '교육'이라는 걸 '아주 쉽게'(겨우 한두 달 만에) 그리고 '남몰래'(누가 알아채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포기해버린 건데, 이것 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녀석이 하자는 일들이 추호도 비교육적이지 않았고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어서 차라리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녀석이 단 1분도 쉬지 않고 들이대는 간단없는 프로그램 운영에 말려들어 혼신을 다하여 따라가게 된 것이다. 뒤늦게 겨우 만 세 살짜리로부터 '교육'의 기본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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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 J. M. Coetzee / 왕은철 옮김 《슬로우 맨 SLOW MAN》 들녘 2009, 23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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