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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식물성 사유와 동물성 사유

by 답설재 2017. 8. 19.

죽음을 구체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봄, 이 여름이 마지막 봄, 마지막 여름일 수도 있겠구나 하게 되고 그럴 때는 그 봄, 여름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피어나는 잎, 무성해지는 나무가 '무심하게' 보입니다. 속물이어서 별 수 없겠지만 '언제까지나 저렇게 피어나겠지' 하고 내가 없는 세상의 봄, 여름을 떠올립니다.

 

이런 생각을 쓸 때마다 '일언지하'에 '깔아뭉개는' 댓글을 봅니다. '내년에도 죽지 않고 또 맞이할 봄'이라는 의미이거나 '죽더라도 높은 분의 뜻에 따라 보다 높은 세상에서 다시 무엇이 되겠지만 그런 건 제쳐놓더라도 육신은 적어도 저 식물들의 거름은 된다'는 의미이거나 기껏해야 '저 잎도 사실은 지난해의 잎은 아니라'는 의미일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럴 때 나는 그 뜻을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제대로 모르는 것이지만 그도 나의 감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고, 여기 이 블로그가 무슨 대단한 곳이라고 결국은 객쩍은 결과가 될, 둘이서만 엄중하고 남이 보면 같잖은 토론을 벌일 것까지는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인데, 답글을 가능한 한 '싹싹하게' 다는 나의 경향은 사실은 그런 사람을 피하기 위한 예방조치일 뿐입니다.

 

이장욱 시인의 에세이 「동물원의 시」 1~7 중 5 부분입니다. 『現代文學』 2017년 8월호(114~121쪽)에 실린 이 글을 읽었습니다.

 

 

 

동물원의 시

 


동물들과 달리 식물들은 우리에게 무궁한 것을 가르쳐준다. 숲속의 나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하나라고 말하는 듯하다. 숲이라든가 산이라든가 수목원 같은 곳을 거닐 때 우리는 개체를 초월한 감정의 풍요를 느낀다. 이것은 착시일까? 그럴 것이다.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식물들도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 개화하고 싸우고 병들고 죽어간다. 하지만 우리에게 식물들의 공화국은 개별자의 생존 투쟁보다 더 거대한 상위 체계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비유적 차원에서 식물성의 사유와 동물성의 사유를, 식물성의 감각과 동물성의 감각을 구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식물성의 사유는 대개 환원, 반복, 유기성을 근간으로 삼는다. 식물적 풍경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대개 정적인 사태, 세계의 단일성, 본질, 회귀 등이며, 만물을 감싸 안는 그윽한 포용의 이미지이다. 식물들은 대개 보이지 않는 통일된 전체를 환기하기 위해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물들은 이에 반대한다. 동물들은 언제나 우리의 바깥에 있다. 동물들은 영원을 가르치지 않고 반대로 유연함과 필멸을 가르친다. 동물들은 개체성과 운동성과 생존 본능의 담지자들이다. 그들은 회귀하거나 반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멸한다. 그들은 일회적인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그들은 희로애락을, 오욕칠정을, 마침내 죽음의 불가피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듯하다. 개체성과 생존 본능에 압도된 동물들은 통일된 전제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 다만 본능과 육체성과 타자성을 가르치기 위해 동물들은 인간의 시야로 들어온다.
식물성의 사유가 대체로 나와 너 사이의 거리와 경계를 무화시키고 인간의 비극과 고통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동물성의 사유는 화해와 공감을 말할 때조차 나와 너, 나와 세계 사이의 거리감을 전제한다. 동물들은 대개 비극과 고통을 그대로 안고 인간의 시선 속으로 들어온다. 동물들은 인간을 감싸 안지 않는다. 인간은 동물들을 바라보고 동물들도 인간을 바라본다. 동물과 인간의 시선은 무수하게 교차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어긋난다.
이르쿠츠크의 사설 동물원에서 사육당하는 동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동물의 고통이 곧 세계의 고통이며 드디어 견딜 수 없는 분노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육당하는 동물들이 물끄러미 인간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귀엽다거나 신기하다거나 무섭다는 인간의 시선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일이 얼마나 안이한 일인지를 천천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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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대산문학상〉 수상

 

 

 

 

                                                                                                                            20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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