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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K노인의 경우

by 답설재 2017. 8. 27.






K노인의 경우











  K 노인의 경우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일은 자신의 것도 잘 알 수 없긴 하지만 그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잊은 것은 있다 하더라도 이쪽에서도 몰랐던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수십 년을 함께한 친구입니다. "뗄래야 뗄 수 없는"이라는 말은 이럴 때 적절할 것입니다.


  그가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게 언제인지, 어떤 일이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회복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비록 건드리기만 하면 무너져버릴 노인일지라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의욕을 보여주려는 의지도 그대로인 것 같고 목소리나 표정에 큰 변화가 없어서 무어라 꼬집어 드러내기는 어렵지만 어디엔지 그 실의가 스며든 것은 분명하다는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들에 대한 기대, '얼른' 혹은 '차츰' 이 삶을 완성해 가야 한다는 의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아도 좋을 '인정' 혹은 '존경'에 대한 최소한의 의욕…… 말하자면 삶을 지탱해주는 그런 것들에 대해 어느 한 가지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말겠구나 싶은 좌절감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오늘 드디어 속의 것을 쏟아내었습니다.


  "난 말이야, 어릴 때부터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겐 내 간을 빼주었어. 부모, 형제, 친구, 이성, 동료, 선후배…… 그런데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 간을 먹고는 하나같이 다 멀어져 갔어. 그렇게 잘라주어도 남은 간이 또 자랄 때는 그들이 멀어져 가는 걸 몰랐지. 왜냐하면 그 간이 자라는 것만큼 그걸 잘라주어야 할 사람은 줄을 지어 나타났으니까. 그러다가 이제 간이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된 거지……. 그럼 이제라도 잘라주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묻고 싶지? 이제와서? 지금까지 다 잘라주며 살았는데? 이제와서 나더러 간을 잘라주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조차 없어. 내 간을 잘라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지금도 있으니까.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으니까. 잘라줄 간이 있지 않느냐며 서성대고 있으니까. 멈칫멈칫 하는 나를 보고 끝까지 나쁜 인간으로 남고 싶으냐고 다그치며……."


  그는 그 말을 하고 난 뒤에 "내가 어떻게 이런 얘기를 했지?" 하고 놀라워 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도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대체로 그랬지만 오늘도 나는 그의 이야기를 잘 듣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늘 이야기를 들어준 상대방의 대답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런저런 일을 소재로 한 대화속에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스며들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며 지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나는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기만 했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조금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도 이젠 지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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