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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사랑의 여로

by 답설재 2017. 9. 12.

 

 

 

그는 물리학을 사랑했습니다. 어쩌면 명예와 화려한 활동도 사랑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합니다.

사랑이라니! 그가 사랑한 대상은 오래전에 떠난 그의 부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 얘기를 해도 좋을 때, 그런 장소에 앉게 되면, 그는 먼 나라의 유명한 대학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그의 연구실 얘기도 하고, 한시도 잊은 적 없다는 그의 부인 얘기도 합니다. 그가 지금 그 먼 나라에 있지 않고 여기 우리 동네에 와 있는 것도 사실은 그 부인과의 추억이 너무나 생생해서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명예? 국가·사회적 활동?

분명히 그런 것도 좋아하긴 했습니다. 멋진 나라들의 음식 얘기도 하고, 부인과 함께 그런 나라의 한적하고 행복한 길을 걸은 얘기도 하고…… 여러 나라 대통령을 만난 얘기도 하고, 이제는 허접한 점퍼를 입고 공항에 나가면 "VIP 실로 가지 않고 왜 줄을 섰느냐?"고 한다는 얘기도 하고, 자신이 학술원 회원이라는 얘기도 합니다.1

 

몇 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한 해에 두어 차례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떠나곤 했는데 그때는 바닷속 미생물에 빠져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 흔적이 그의 블로그에 남아 있지만 그는 이제 스쿠버다이빙 따위를 하러 가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산소통을 둘러메고 바다에 뛰어들기에는 아무래도 노쇠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가지 않느냐?"는 유치하고 우스운 질문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해마다 나이를 한 살씩 먹지만 그는 몇 년 전부터 계속 83세 정도인데 나는 그 이유도 묻지 않습니다. 그것도 유치하고 우스운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요즘은 몰티즈인가,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저 개 "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아름다워진다더니 요즘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치고 그만큼 멋지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런 건 저도 좀 겪어봐서 알지만, 누가 그를 사랑해주면 그가 저 개에게만 사랑을 줄 리가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좀 겪어봐서 아는 것입니다. 그게 아무래도 내 마음을 스산하게 합니다.

다행히 벤도 그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전화를 하면 녀석이 짖어대는 소리가 끝까지 들립니다.

("나하고 놀면 되지 무슨 전화질이에요?")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둘이서 식사를 하곤 했는데 이제는 두어 번씩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그에게서는 노인 냄새가 납니다. 누가 그 냄새를 좋아하겠습니까? 사실은 나에게서도 그런 냄새가 나고 그는 그걸 나에게 말하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쓸데없는 생각도 쓰겠습니다. 그가 죽으면("죽긴 왜!") 유명인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그 빈소를 지켜주겠지만, 나는 그 빈소 구석 어느 자리에 앉아서 그의 영정을 오랫동안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걸핏하면 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생각은 실제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그냥 생각뿐이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미안한 일입니다. 죽음이니까…….

 

일전에는 내가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로 걸어가는 걸 저 벤과 함께 지켜보며 몇 번 불러도 내가 알아채지 못하더랍니다. 큰 소리로 불렀지만 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 괜히 가슴이 아픕니다.

사랑해야 할, 사랑할 만한, 그 사랑이 사라져가도 또 나타나는 사랑의 대상이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인지 서글픈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그에게 벤 다음에 또 다른 사랑의 대상이 나타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게 차라리 낫겠습니다.

 

"벤! 고마워! 잘 좀 부탁해! ^^"

"벤, 오늘 그가 내게 자랑했어. 넌 수면 시간을 철저히 지키고, 흥분했을 때나 멀리 있을 때는 더러 실수도 하지만 배변이 비교적 깔끔하고, 내 친구의 식탁에서 조르지 않는 것, 세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고집불통이고 자유분방하고 아주 개구쟁이라는 것. 내가 듣기엔 뒤의 것들이 더 좋은 것 아닌가 싶었어. 그가 연구한 것은 저 넓은2, 나는 그걸 짐작하는 일조차 포기해버린, 그야말로 상상을 불허하는 우주 공간이었지만, 벤, 지금 그가 새로 연구하게 된 건 네 머리와 네 가슴이야. 그러니까 네 머리, 네 가슴은 그 우주만큼 신비스러운 것이어야 해. 벤, 내 말 알아듣겠니?"

"벤, 우린 말이야. 음…… 고독하거나 외롭진 않아. 다만 아주 조금 심심할 뿐이야. 우리를 우습게 여기진 마. 어쨌든 내 친구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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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명성이나 업적은 굳이 쓰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2. 얼마나 넓은 줄 아니? 빛이 1년간 가는 거리가 1광년이야. 저 무수한 별들 간의 거리가 네 생각엔 대개 몇 광년일 것 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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