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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테이아 오브레트 《호랑이의 아내 The Tiger's Wife》

by 답설재 2019. 10. 21.

테이아 오브레트

《호랑이의 아내 The Tiger's Wife

왕은철 옮김, 현대문학, 2011

 

 

 

 

 

 

 

 

 

 

1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그다음 날 아침부터 40일에 이르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 여정이 시작되기 전날 밤, 영혼은 땀내가 밴 베개에 가만히 누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눈을 감겨주는 모습을 지켜본다. 또한 문과 창문과 바닥의 틈새로 영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방 안을 연기와 침묵으로 가득 채우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혼이 강물처럼 집 밖으로 흘러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사람들은 동이 틀 무렵 영혼이 자기들을 떠나 과거에 머물렀던 곳, 즉 젊었을 때의 학교와 기숙사, 근대 막사와 주택, 허물어졌다가 다시 지어진 집들, 그리고 사랑과 회한, 힘들었던 일들과 행복했던 일들, 희망과 희열로 가득했던 일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소중한 기억들이 가득한 장소들을 둘러보리라는 걸 안다. 그러다 영혼이 너무 오랫동안 아주 먼 곳에 가 있게 되면 돌아오는 것 역시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이러한 까닭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해오던 의식을 중단하고 몸에서 풀려난 영혼을 환영하기 위해 청소를 하지도 않고 씻거나 정돈하지도 않고, 40일 동안 그 사람의 소지품들을 치우지도 않는다. 영혼이 미련과 그리움 때문에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또 어떤 메시지나 신호나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하는 것이다.

제대로 유혹하면, 영혼은 다시 돌아와 서랍을 뒤지고 천장 안을 들여다보고 점시 걸이와 초인종과 전화기를 살펴보면서 그것은 편리함을 떠올리고는, 손으로 만져보기도 한다. 그 소리로 집안사람들에게 자신이 와 있다는 걸 알리며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할머니는 전화로 조용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내게 말하고 나서 그런 얘기를 했다. 할머니에게 40일은 사실이자 상식이었으며, 이는 시부모와 친정부모, 언니, 사촌들과 고향 사람들을 저세상으로 보내면서 물려받은 지식이었고, 그것은 특별히 신경을 쓴 환자를 할아버지가 잃을 때마다 할머니가 그를 위로하려고 되풀이했던 말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그걸 미신이라고 했지만, 할머니가 나이 들어갈수록 그러한 생각이 더욱 굳어지자 그냥 용인했다.(14~15)

 

작가 테이아 오브레트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고국을 떠났답니다. 소설에는 실제 지명은 나타나지 않았고 전쟁이 지나간 발칸 반도의 '갈리나' 마을이라고만 되어 있었습니다. 치열한 내전을 겪은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등 자그마치 7개국으로 갈라졌지만 소설에는 역사적인 내용이나 전쟁의 경과 같은 건 단 한 문장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전쟁은 사람들까지 바꾸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그다음 날 아침부터 40일에 이르는 여정을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그걸 미신이라고 했지만, 할머니가 나이 들어갈수록 그러한 생각이 더욱 굳어지자 그냥 용인했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한 첫 부분에서부터 익숙한 느낌이었습니다. 사람 사는 건 어디나 같은가 보았습니다.

 

 

 

2

 

할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게 두 개의 이야기, 즉 호랑이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와 죽지 않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 사이에 있다. 이 이야기들은 은밀한 강처럼 할아버지의 군대 시절, 할머니를 향한 사랑, 외과 의사이자 병원의 폭군으로 지낸 세월 등과 같은 다른 모든 이야기들을 관통한다. 그가 죽고 나서 내가 알게 된 이야기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어른이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가 내게 해준 다른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다시 아이가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47)

 

우화와 사실을 연결하고 있어서인지 환상적인 일들도 필연적인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백 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소설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그 소설에서처럼 과거의 일들이 사실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죽지 않는 남자 이야기, 호랑이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나탈리아 스테파노비치가 할아버지처럼 의사(육군의과대학 수련의)가 되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펼쳐갑니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사랑,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삶에 대해 해석하고 할아버지를 향한 손녀의 사랑과 슬픔을 이야기합니다.

 

 

3

 

할아버지에 대한 회상은 삶이 아름답게 느껴지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 내가 더 이상 네게 뭘 얘기할 수 있겠니? 할 얘기가 뭐가 있겠어? 나는 네 할머니와 교회에서 결혼했단다. 하지만 네 할머니의 가족이 내게 호자(이슬람 성직자)의 주례로 결혼하라고 했다고 해도 나는 네 할머니와 결혼했을 거야. 네 할머니가 내 조상들을 위해 교회에서 촛불 켜는 걸 마다하지 않는데, 내가 일 년에 한 번 네 할머니에게 에이드(이슬람 명절) 인사를 하는 게 뭐가 그리 대수겠니? 나는 정교도로 자랐단다. 원칙적으로 한다면 나는 네 어머니에게 가톨릭 세례를 받게 했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네 어머니에게 세례를 시키지 않았지. 세례함에 든 더러운 물에 풍덩 빠지지 않도록 말이야. 내 이름, 네 이름, 네 어머니 이름, 결국 너에게 필요한 건 네가 땅에 묻혀야 하는 시간이 될 때, 너를 그리워할 누군가란다. (…) (368)

 

할아버지 이야기가 따듯하고 가슴 시린 시를 읽는 것 같았습니다.

 

 

4

 

감동적인 몇몇 인물들의 평전을 읽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가장 위대한 곰 사냥꾼' 다리샤의 장렬한 최후는 이렇습니다.

 

 

동이 트기 한 시간 전, 다리샤는 피가 낭자한 눈 속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호랑이가 그의 심장을 먹고 있었다. 눈이 누리끼리한 악마가 갈리나의 거무튀튀한 나무들 사이에서 그의 심장의 오목한 부분에 이빨을 박고 있었던 것이다. 다리샤는 처음에는 기겁을 했다. 갈비를 만져보자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남아 있는 힘을 끌어모았다. 수년간 곰의 심장을 달여서 먹었기에 낼 수 있는 힘이었다. 인간의 심장이 없어지자, 다리샤는 네 발로 기었다. 그의 등이 산처럼 솟아오르고, 그의 눈이 어둠으로 가득해졌다. 이가 유리처럼 튀어나와서 곰의 누런 이로 변했다. 그는 달빛을 등지고 호랑이를 덮쳤다. 온 숲이 그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요동쳤다.

바람이 갈리나의 나무 우듬지를 통과해 동쪽으로 불어가는 밤이면 그들이 싸우는 소리가 아직도 들린다. 다리샤 곰은 거대한 몸을 호랑이의 옆구리에 부렸다. 누런 눈의 악마는 다리샤의 어깨를 이빨로 물어뜯었다. 둘은 서로를 물어뜯으며 눈 속을 굴렀다. 그들의 싸움에 나무들이 넘어지고 바위들이 날아갔다.

아침이 되자, 끔찍한 싸움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리샤 곰의 살가죽과 피로 얼룩진 들판 외에는. 그 들판에는 지금까지 꽃이 피지 않는다.(393~394)

 

 

5

 

25세(!)의 작가 테이아 오브레트는, 내내 전혀 흥분하지 않았고 단 하나의 싱겁거나 얄팍한 문장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읽었습니다.

나도 레안드로 스테파노비치 같은 할아버지로 기억되면 좋겠지만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소설의 앞에는 이런 헌사가 적혀 있었습니다.

"나의 외할아버지 슈테판 오브레트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