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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듀나《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

by 답설재 2019. 9. 26.

『현대문학』 2019년 8월호(104~199)

 

 

 

이스라엘 히브리대 역사학과 교수 유발 하라리(Harari, 『사피엔스』 등)는 2100년 이전에 나타날 신인류는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은 신(神)적 존재"가 되며, "21세기 후반의 신인류는 생명을 창조하고, 정신을 통해 가상·증강현실에 접속하며, 신체를 계속 재생해 사실상 불멸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2100년에 가장 활발히 거래되는 상품은 건강한 뇌, 피, 신체기관이 될 것"이란 전망도 내놓았습니다.1

 

요즘 그런 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공지능, 가상현실 얘기.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눈을 떠보니 천국이었다.

화사하게, 밝지만 눈이 부실 정도는 아닌 사파이어빛 하늘, 솜사탕 모양으로 군데군데 떠 있는 하얀 구름, 얼굴을 간질이는 산들바람 그리고 내 몸을 침대 위로 누르는 0.9G의 중력.

나는 이불에서 양손을 끄집어냈다. 정신을 잃기 전 온몸을 불사르던 화염이 남긴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손톱은 깨끗했고 완벽한 좌우대칭으로 깎여 있었다.

도대체 난 얼마나 죽어 있는 것일까?

나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평선 너머로 끝없이 이어진 연두색 풀밭이 전부였다. 우주 재난 생존자들에겐 지구를 상징하는 이 무한한 풀밭이 심리적 안정을 준다는 통계 결과가 있다. 하지만 거의 평생을 소행성대에서 살아온 나에게 이진수로 만들어진 평원은 어떤 위로도 주지 못했다. 적당히 흐트러진 호텔 방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소행성대 연방우주군 제복을 입은 키 큰 사람이 가브리엘 대천사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이 동네에서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시민?"(104~105)

 

이 '시민'은 우주 공간의 화염 속에서 몸의 4분의 3이 날아가고 뇌와 척추 일부만 간신히 살린 AI 반, 진짜 사람 반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치료 캡슐의 시뮬레이터가 뇌에게 육체의 환상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고 전개됩니다.

소설가가 보여주고 설명하는 그 현실(지금 우리가 '가상현실'이라고 부르는, 그러나 언젠가는 '현실'일 그 현실)은 아무래도 황량하고 척박한 곳으로 다가왔습니다. 태양계 전체를 삶의 터전으로 한다 해도 그곳은 답답하고 갑갑할 것 같았습니다.

'결국 이렇게 살게 되는구나.'

공연히 걱정이 되었다가 내가 이승에서 사라진 다음에 벌어질 일이어서 이내 다행스럽다 싶었는데 언젠가 내 후손이 겪을 일이라는 생각에 다시 걱정스러워하며 읽었습니다.

이렇게 끝납니다.

 

"(…) 이제 넌 뭘 할 거니?"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주일 전과는 달리 나는 이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외엔 특별히 달라진 것도 없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들과 좋아하는 것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태양계 안을 전보다 쉽게 오갈 수 있으리라. 며칠 쉬었더니 벌써 해야 할 일이 쌓여가고 있었다. 이게 소설이나 게임처럼 새로운 모험의 문을 여는 시작이면 좋겠지만 어쩌랴.

"출근해야지, 뭐."

내가 대답했다.(199)

 

가상현실에 대한 소설가들의 발상이나 예측은 그야말로 '마음대로'이겠지요? 말하자면 믿을 게 못 되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과학자들의 머리는 작가들과 전혀 다를까요?

어쩌면 과학자들은 소설가들이 묘사하는 저 태양계에서의 삶을 그대로 실현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아, '천국'은 내가 갈 곳은 아니지만 그 천국이 저런 곳이라면 그것도 많이 섭섭하고 허전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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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 나 1992년부터 영화 관련 글과 SF를 쓰고 있음. 소설집 『면세구역』 『태평양 횡단 특급』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두 번째 유모』 『구부전』 등. 연작소설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 장편소설 『민트의 세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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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문 '이세돌 1(마음연구)' 참조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8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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