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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책 냄새

by 답설재 2019. 9. 10.

 

『현대문학』 2019. 4.

 

 

 

 

1

 

나는 책 냄새가 좋다. 책갈피에서 피어오르는 냄새가 나는 좋다. 그 냄새 속에는 책이라고는 교과서밖에 없었던 초등학교 때의 내가 들어 있다. 내 책을 내고 싶었던 내가 스며 있다. 나를 두고 가버린 사람들은 갈 때는 뿔뿔이 사라져 놓고 지금은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은 채 거기에 모여 있다. "내 생명의 빛, 내 가슴의 불꽃. 나의 죄악, 나의 영혼. 롤리타", 내가 사랑한 소녀도 들어 있다. 소녀는 한결같다. 혼자 있을 때 나는 마음 놓고 책 냄새를 맡는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공간에서 쓸데없는 일로 서성거리고 있으면 나는 졸음을 쫓을 때처럼 혹은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그러는 것처럼 책갈피 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는다. 책 냄새를 맡는다.

 

 

2

 

나는 책 냄새가 '너무나' 좋다. 잉크 냄새겠지만, 그 냄새 속에 약간의 발암물질이 스며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해도 나는 책을 펼칠 때마다 그 냄새를 맡을 것이다. 발암물질? 끝내 나를 망치지 않을 것이 세상의 어디에 있으랴. 나는 기꺼이 그 발암물질 냄새를 맡을 것이다.

 

 

3

 

내가 다시 대학에 다닌다면 졸업을 앞두고 어느 출판사 부설 인쇄소 직원 모집에 원서를 낼 것이다.

"왜 이 회사에 입사하고 싶습니까?"

면접관의 그 뻔한 질문이 내 가슴을 얼마나 울렁거리게 할 것인가.

"잉크 냄새를 맡고 싶어서요!"

면접관이 멀뚱멀뚱 쳐다보면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저는 잉크 냄새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4

 

새책 냄새가 아니어도 좋다. 도서관에는 잉크가 오랜 세월 종이에 배어 들어간 냄새가 안개처럼 일렁거리고 있다. 돌아서면 그리워지는 도서관 서고. 그 냄새가 그리워지면 읽던 책의 책갈피에 얼굴을 묻는다. 아, 그리운 도서관 사서들, 출판사 직원들, 윤전기 앞의 사람들, 내가 부러워하는 줄도 모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사람들…….

 

 

5

 

나는 퀴퀴하지만 친숙하고 책 냄새가 '너무나' 좋다. 고맙고 사랑스럽다. 이건 아무래도 은밀한 사연이어서 털어놓기가 싫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내게서 이 얘기를 들으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나를 더욱더 싫어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제 '막 가는 길이니까' 그리고 끝내 숨기고 갈 필요까지는 없으므로 이렇게 털어놓게 되었다. 괜찮겠지? 책 냄새가 얼마만큼 좋은가 물으면 내가 좋아한 사람 냄새만큼이라고 할까? 아니, 그보다 더? 아니, 아니, 그건 변해버릴 수 있다. 사람의 일이니까. 그렇지만 책 냄새를 좋아하는 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책 냄새를 '너무나' 좋아한다. 이제 곧 책을 읽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을 초조함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렇게 된 날에도 나는 책 냄새를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