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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웃기는 데카르트

by 답설재 2019. 8. 19.

 

 

 

  1

 

'웃기는 데카르트'는 불손하고… 그렇다면 '우스운 데카르트'?

'재미있는 데카르트'가 어떨까 하다가 만만한 사이라면 이처럼 '웃기는' 이라든지 '우스운'이라는 표현도 가능했겠지 싶었다. 당연히 데카르트와 그런 사이는 아니다. 그런 사이인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우리는 옛사람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 그와 같은 많은 사람들의 작업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커다란 혜택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전시대가 올바로 발견한 것을 알게 되고, 나아가 모든 학문 영역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탐구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이때 독서에 너무 심취하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조심해도 자신도 모르게 오류에 빠질 위험이 대단히 크다. 작가들은 대체로 대충 믿어 버리는 성향이 있으므로, 어떤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아주 교묘한 논증을 동원해서 우리를 자신의 견해로 이끌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운 좋게 확실하고 명증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들은 항상 이것을 아주 애매한 말로 포장해서 설명한다. 이는 그 근거의 단순성이 자신이 발견한 것의 가치를 감소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혹은 우리가 명백한 진리에 이르는 것을 시기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2013, 23)

 

 

 2

 

* 작가들은 대체로 대충 믿어 버리는 성향이 있다.

* 그들은 아주 교묘한 논증을 동원해서 우리를 자신의 견해로 이끌려는 경향이 있다.

* 운 좋게 확실하고 명증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들은 항상 이것을 아주 애매한 말로 포장해서 설명한다.

 

이 내용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고 가정하면, 청중은 대체로 강사에게 호의적인 경향이고(가르쳐주려고 왔으니까), 그 강의를 듣게 된 것이 거의 의무적이라면 차라리 지루한 느낌을 갖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웃어도 좋을 이유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웃어주는 경향이니까 적어도 데카르트의 그 강의에 대해 청중은 적어도 세 번은 웃었을 것 같다. 아니면 이 글을 읽을 때의 나처럼 서서히 미소를 짓기 시작해서 마침내 '데카르트가 나를 이처럼 즐겁게 해 주다니!' 생각하다가 남들이 웃는 걸 보면서 덩달아(혹은 마음놓고) 크게 웃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들은 그런 사람들이구나 생각하니까 '정말 그래!' 싶어서 재미있고, 분명히 속상해할 그 작가들을 생각하니까 그것도 재미있다.

그런데 이것 좀 봐! 작가들이 운 좋게 확실하고 명증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면, 항상 이것을 아주 애매한 말로 포장해서 설명하는 이유는 더 재미있다.

 

* 그 근거의 단순성이 자신이 발견한 것의 가치를 감소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혹은 우리가 명백한 진리에 이르는 것을 시기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3

 

이 글은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중 '3 규칙'의 첫머리이다.

 

데카르트는 저렇게 써놓고 작가들 모두가 설령 솔직 담백해서 의심스러운 것을 참된 것이라고 강요하지 않고, 성실한 믿음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누구를 믿어야 할지는 여전히 분명치 않은데 그건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말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이 그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오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사물의 인식에 이르게 해주는 '오성'의 작용은 '직관'과 '연역'뿐이라고 하고 그 두 가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 설명은 전혀 우습지 않다.

 

 

  4

 

그걸 다 설명한 다음, 데카르트가 잊지 않고(혹은 '잊으면 큰일이나 날 것처럼', 그것도 아니라면 '느닷없이'?) 덧붙인 것이 있다. 여기에선 '웃긴다'고 표현할 수는 없고 잊지 않고 덧붙인 것을 재미있다고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인식이 신이 계시한 것보다 더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신에 의해 계시된 것에 대한 믿음은, 은밀한 것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지성의 활동이 아니라 의지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지성 속에 어떤 기반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위의 방법을 통해 발견할 수 있고 또 발견해야 한다. (…)

― 위의 책 28.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의 강의실에 앉아 있는 십 대 후반 혹은 이십 대 초반의 나를 그려보았다.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데카르트의 표정을 나는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무슨 질문도 했겠지? 그는 다음 시간에 그걸 설명해주겠다고 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만족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래도 좋다면 연구실로 따라가서 말씀을 더 듣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