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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장강명 〈한강의 인어와 청어들〉

by 답설재 2019. 11. 10.

  장강명 〈한강의 인어와 청어들〉

《現代文學》 2019년 11월호 58~83

 

 

 

 

 

 

 

 

 

1

 

소설의 성격은 참 묘한 것 같았습니다. 뭔가를 가르치려는 기색이 보이기만 하면 정나미가 떨어집니다. 아무리 급하고 긴요하다 해도 소설에서까지 뭔가를 배우고 싶진 않은 것입니다. 일찍이 형편없는 인간인 걸 알아차린 아내가 두어 번 "책을 그렇게나 읽으면서 생각이나 하는 짓거리는 어째 그 모양이냐?"고 힐난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억울하기만 했습니다. 철학, 역사, 과학 같은 것이, 특히 남녀 간의 사랑 같은 걸 재미있게 써놓은 소설 나부랭이가 내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칠 리가 없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억울해서 아내의 그 핀잔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억울하다고 하지 그랬느냐고 하겠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입니다. 아내는 "그럼 그만 보라!"고 했을 것이 아닙니까?

 

 

2

 

이 생각을 뒤집어보면 미안한 점도 그만큼입니다. 아내는 그렇게 여겼겠지요? '워낙 근본이 없어서 그렇지 부지런히 읽는 걸 보면 언젠가 어느 정도의 바탕은 마련되겠지?'

나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두어 가지, 내 행동이나 사고방식에는 한 방울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책 나부랭이를 읽고 있으니…… 그러면서도 눈이 침침하다느니, 시력이 작년 같지도 않다느니, 사시(斜視)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느니 하고 있으니, 아내는 정말 나에게 언제까지 속을 것인지, 혹은 다 알면서도 저렇게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인지…….

 

 

3

 

이번에 이런 얘기를 하기에 적절한 소설 한 편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밤섬 당주 이현수와 어울리면서 여러 가지 신기한 사건들을 보고 겪었다. 다음은 그 초창기 일화다.

어느 날 이현수가 며칠 뒤 한강의 인어들을 만날 일정이 있는데 나더러 합석하겠느냐고 물었다. 소설 소재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나는 한강에 인어가 사느냐고 되물었다.

"2백 명쯤 살 겁니다. 두 그룹이 있는데, 한 그룹은 중상류에 살고 다른 한 그룹은 밤섬 근처에 삽니다."(58)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을 보고도 읽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읽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4

 

이 소설은 또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한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표정입니다. 그래 재미로, 순전히 호기심으로 읽고 있었던 나는 좀 뻘쭘한 느낌이었고, 괜히 어떤 철학을 배경으로 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새로 읽거나 이른바 '본격적인 탐구'를 해야 할 듯해서 못마땅했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집어치워! 재미있었으면 그만이지, 뭐야 이건! 그렇지만 내가 뭔가 착각한 건가? 결말 부분이어서 내가 공연히 무슨 철학 같은 게 스며 있을 걸로 생각한 건 아닐까?'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버리고, 모든 신성한 것은 더럽혀지며,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생활 조건에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 냉정히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내가 불쑥 말했다. 외우고 있는 줄도 몰랐던 문장이었다.

"아까 그거, 무슨 말이었어요?"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서 나와 한강공원에 왔을 때 이현수가 물었다.

"『공산당선언』의 한 구절이에요."

내가 말했다.

"『공산당선언』? 그게 뭔데요?"

이현수가 다시 물었다. 밤섬 인어들은 물론이고 옆에서 걸어가는 늘푸른약국 약사도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공산당선언』을 몰라요?"라고 되물으려다가 참았다. 아주 오래전에 알았던 것과 다른, 어딘가 뒤틀리고 뭔가 이상한 세계에 내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는 달맞이공원에 이를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83)

 

소설이 어떻게 끝나든, 내가 무슨 착각을 했건 말건 나는 지금까지 인어 이야기를 읽고 있기 때문에 살풋한 미소를 지어오던 그 분위기를 잃지 않고 책을 덮었습니다.

'한강의 인어와 청어들'도 이들의 대화를 들었을 것 같았고, 다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소설이란 내 평생 그런 것들이었으니까…… 결코 나를 고쳐주지는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