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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아빠! 얼른 또 만나~"(아빠들에게, 세상의 선생님께)

by 답설재 2021. 12. 17.

★ 아빠들에게

 

 

2011년 8월 23일 오후, 전철역에서였습니다. 열차를 갈아타려고 걸어오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별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아빠! 또 봐~"

 

"아빠! 잘 가~"

 

"아빠! 얼른 또 만나~"

 

"아빠! …………"

 

"…………"

 

멀어져 가는 거리를 그 외침으로 메워보려는 듯 그 아이는 연달아 외치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 외침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환승역은 언제나 번잡합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의 외침이 너무나 애절해서, 아주 또렷하게 들려서 '아빠!' 그 외침이 들려오는 곳을 찾아 주변을 살폈습니다.  아이는 이미 인파에 묻혔을 것입니다. 순간! 키가 큰 삽십 후반 아니면 사십 초반의 그 아빠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꾸자꾸 뒤돌아보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얼른 그 아빠 대신, 어쩔 수 없어서 멀어져 가는 아빠 대신, 그 아이를 찾으러 뒤돌아섰습니다. 아빠는 작별을 했으니까 아이의 외침에 맞추어 몇 번 고개만 끄덕이고(눈물을 머금었을까요?)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섰겠지만, 나로서는 그 아이를 보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젠 서로 멀어졌으므로 인파에 묻혀 어쩔 수 없이 아빠를 부르는 걸 포기했을 것입니다. 아이 옆에는 아이의 엄마가 함께 있었을까요? 나는 그렇게 기대하고 싶었습니다. 아니라면 나는 나의 무너지는 마음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어서 나는 그 아이를 내 가슴에 어떻게 넣어두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연을 나는 더 자세히 상상하는 일이 불가능했습니다.

 

 

 

 

 

 

☆ 세상의 선생님께

 

나는 다만, 세상에는 가슴 저린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애절한 사랑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 그러므로 그 사랑만으로 살아가면 얼마든지 따듯하고 아늑한 세상일 텐데, 왜 우리는 그렇지 못한 세상을 만들고 있는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을 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일들도 가늠할 수 없는데 어떻게 사이좋게 살아가라고 행복하라고 부탁할 수가 있겠습니까?

엄마나 아빠 없이 살아가는 경우도 많은 세상이 되었고, 학교는 그런 아이가 마음 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사회일지도 모릅니다.

 

집에는 '엄마'가 없지만 학교에 오면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머리가 아프다고 꾀병이라도 부려서 아니면 그건 전에도 여러 번 그렇게 했으니까 이번에는 어디가 조금 긁혀서 보건실에 내려가기만 하면 따듯하고 고운 보건 선생님께서 웃으며 맞이하시고 그 아름다운 표정으로 그걸 들여다보시고 함께 아파하시므로 사실은 그 정이 얼마나 깊은 것입니까? 따듯한 것입니까?

 

그러면 된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만큼만의 사랑만 있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정, 그런 사랑이 필요한 곳은 특히 초등학교 6년간입니다. 그 6년간만 어떻게 어떻게 하며 버틸 수 있으면 중학교, 고등학교는 당연히 어렵기는 하겠지만 더 어려워져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만난 그 보건 선생님은 학교에는 '최악의 경우' 마지막까지 보건교사가 '엄마'처럼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최악의 경우'는 적지 않았습니다.

 

'보건 선생님' 말고 '담임 선생님'이라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국어 선생님이면 어떻고 체육 선생님이면 어떻겠습니까?

아니, 행정실장님이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학교'라는 곳에서 그렇게 살고 싶어 하다가 돌아왔는데 그러다가 오해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지금도 이 따위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와 나에게

 

 

"전적으로 윤리적인 듯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존재한다. 즉,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진실들의 희생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일단 자신의 진실들을 인정하면, 그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는 것이다. 뭔가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부조리를 의식하게 된 사람은 영원히 거기에 묶이게 된다. 희망이 없는 사람, 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이미 더 이상 미래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자신이 창조한 그 우주에서 빠져나오려 애쓰는 것 또한 그만큼 당연하다."

 

                                                       - 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49.

 

 

그대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그대는 그 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걸 후회합니까?

그 진실의 노예가 된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대에게는 사랑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