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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부부 : 행운의 세례 혹은 상극관계

by 답설재 2023. 4. 30.

시험기간이 되면 모두들 집에 일찍 들어가고 나 혼자 쏘다녔습니다. 하기야 나는 동기생들하고는 놀지 않고 시내에 나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녔을 뿐이어서 대학생 주제에 들어앉아 허접한 내용들을 죽어라 암기하거나 좁쌀 글씨로 써서 커닝 준비를 하는 일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저렇게 해서 발령이 난들 선생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들 했는데 두어 명 여학생은 측은하게 여기고 도와주고 싶어 했습니다.

과제물을 만들어주기도 했고 저녁에 남 안 볼 때 불러서 찾아가면 노트 복사물을 주면서 좀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친절을 베푼 여학생(여 선생님) 한 명을 나중에 남한산성 동기회 때 만나게 되었는데 이런저런 시간 중에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는데도 둘이서 걸을 수 있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 기회에 그녀가 이야기했습니다.

"대학 다닐 땐 관심도 없었는데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관내 동기생 야유회 때 유행가 부르는 걸 보고 마음이 흔들려 함께 살게 되었어요."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 유행가를 잘 부르면 그런 호기도 누릴 수 있구나...' 나에게 뒤늦게나마 유행가 연습에 열중해서 새로 결혼을 할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어쨌든 어처구니없는 일 아닌가?' '이게 이른바 그 운명 혹은 숙명이라는 건가?' 싶어 하고 있는데 한참만에 그녀가 덧붙여 물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유행가를 멋지게 불러서 하게 된 결혼' 혹은 '어처구니없는 결혼'에 온통 정신이 팔려서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도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어요" 할 수도 없었으니 아마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 같고, 이후로 그 순간이 생각날 때마다 뭐라고 한 마디 해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제 그녀를 만날 일도 없게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이야기를 하기는 그렇고 해서 동기생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참 고약한 생각을 가진 철학자 이야기를 읽으며 그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는 척하기보다는 알랭 드 보통의 해석을 그대로 옮겨 쓰는 게 낫겠습니다.

 

불행하게도 끌림의 이론은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너무나 황량한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만일 곧 결혼을 앞둔 독자들이라면 자신들의 계획을 재고하는 불상사를 막으려면 다음 몇 단락을 읽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겠다. 어쨌든 아기를 낳는 데 매우 적합한 상대는 거의 대부분 본인에게는 매우 적합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비록 결혼할 당시에는 생에 대한 의지에 의해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안락함과 열정이 함께하는 사랑은 극히 드문 행운의 세례'라고 쇼펜하우어는 관찰했다. 우리의 아이들이 거대한 턱이나 나약한 기질을 갖고 태어나지 않게 해 줄 연인은 우리를 평생토록 행복하게 만들 인물이 아니기 십상이다.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와 건강한 아이의 출산은 근본적으로 상충하는 두 개의 프로젝트인데, 사랑이라는 것이 장난을 쳐 우리로 하여금 꼭 필요한 몇 년 동안에는 그 두 가지 프로젝트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로도 결코 지낼 수 없을 듯한 사람들이 결혼을 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결코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설명하는 것으로는 미덥지 못했던지 쇼펜하우어의 말을 그대로도 보여주었는데 증거로 삼기 위해 앞부분만 옮겨 쓰겠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성적 관심은 별도로 하더라도, 혐오스럽고, 경멸할 만하고, 심지어 상극으로까지 보이는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게 한다. 그러나 종(種)의 의지는 개인의 의지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그 연인은 자신의 것과 상반되는 모든 특질들에 눈을 감아버리고, 모든 것을 간과하고, 모든 것을 그릇되게 판단하고, 자신의 열정의 대상이 된 인물과 자신을 영원히 묶어버린다. 그런 환상에 빠진 사람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그 환상은 종의 의지가 충족되고 나면 금방 사라지고 이젠 평생을 혐오하면서 살아야 할 파트너만 남게 된다. 바로 여기서, 매우 이성적이고 심지어 탁월하기까지 한 남자들이 종종 잔소리가 심하고 악마 같기도 한 여자들과 사는 이유,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도 왜 자신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 어쩌고 저쩌고 *&^%$#@!).

 

쇼펜하우어 이 사람 심술 부린 것 아닐까요?(^_^)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깨가 쏟아지는 부부는 얼마든지 있잖아요.

유명한 철학자여서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곧이 들을 것 같으니까 '전 세계적으로 훼방이나 놓아보자!' 싶었을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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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쓴 글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알랭 드 보통)이란 책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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