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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한탄 혹은 탄식

by 답설재 2023. 4. 26.

 

 

 

웃고 말면 그만이고 '저러는구나' 하면 섭섭할 일 없긴 하지만 아내로부터 듣는 원망은 끝이 없다.

그중 한 가지는 뭘 그리 중얼거리느냐는 지적이다.

 

이젠 그게 못이 박혀서 혼자 있는 시간에도 나도 몰래 중얼거려 놓고는 바로 후회를 하곤 하니까 반성조차 하지 않던 때에 비하면 그나마 발전한 건 분명하다.

'발전'이라고 표현했으니 말이지만 사실은 '그래, 중얼거리는 것도 버릇이지. 좀 점잖게 살자' 다짐한 것이 여러 번이어서 그럴 때마다 '오늘 이후에는 결코 이런 일이 없으리라!' 결심하면서 '그러니까 오늘이 이 결심의 출발선이다!' 하고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는데, 나도 몰래 그렇게 한탄(혹은 탄식)하고는 또 새로운 결심을 하면서 그 순간을 '출발선'으로 삼은 것도 수십 차례였으니 나는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겠다.

 

그러다가 최근 알랭 드 보통이 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에서 몽테뉴라는 이 분야의 '대선배님'을 만난 것인데 어찌 그리 반갑던지 당장 찾아가서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몽테뉴는 이렇게 주장한 분이다.

 

"가장 많이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오성(悟性)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은 공허하게 비워놓고서 오로지 기억을 채우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므로 그가 꿈꿨던 학교는 학생들에게 단어의 어원보다는 지혜를 가르치고,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오랜 지적 편견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곳이었다.

학문은 고고한 것인가?

아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돌파구를 뚫고, 외교사절을 이끌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분명 눈부신 행위들이다. 하지만 꾸짖고, 웃고, 물건을 사고팔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그대 자신과 더 나아가 그대의 식솔과 마찰 없이 공평하게, 그대 자신을 속이거나 게으르지 않고, 잘 어울려 사는 것보다 더 눈부시고, 또 드물고 어려운 일은 없다.

 

몽테뉴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해석을 더 옮겨 쓰고 싶은데 좀 지루할지 모르겠다. 알랭 드 보통은 '몽테뉴식 지혜에 관한 시험'이라며 다섯 문제를 출제했다. 다섯 문제는 심하니까 딱 두 문제만 옮겨 쓴다.

당신이 이 글을 읽어주는 대신 답은 생각만 하고 직접 제시하지 않아도 좋다.

 

몽테뉴식 문제 1. 다음 문장을 읽고 질문에 답하라.

약 7, 8년 전, 여기서 약 6마일 떨어진 곳에 지금도 살고 있는 한 시골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아내의 질투 때문에 오래전부터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일터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서 예의 잔소리부터 들었다. 그 소리가 그를 얼마나 분노케 했던지,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낫으로 아내를 그렇게 열받게 만든 자신의 신체 부위를 잘라내어 그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수상록」 2권 29장).

 

몽테뉴식 질문

a) 가정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하는가?

b) 그 아내는 잔소리를 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애정을 표현하고 있었는가?

 

얼마나 실제적인 문제인가? 이런 문제를 잘 풀어야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문제를 가르치진 않고 쓸데없는 지식만 주입하고 있지 않은가.

다음은 내가 더 반가워 한 문제다.

 

몽테뉴식 문제 5. 다음 문장을 읽고 질문에 답하라.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미친 짓으로 비치지만 않는다면, 스스로를 탓하면서 자신에게 '바보 얼간이 같으니!'라고 중얼거리지 않고 보내는 날은 단 하루도 없을 것이다(「수상록」 1권 38장).

 

걸핏하면 중얼거리는, 나 자신의 뭔가를 한탄하거나 탄식하는 나로서는 이 문제만으로 쾌재를 불렀다. '와!!! 몽테뉴도 그랬구나~!!! 그런 철학자도 뭐 별 수 없었네~'

 

그건 그렇고 이 문제에 대한 몽테뉴식 질문"자신에 대한 사랑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이다.

뭐 이런 문제를?

그러니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미 머리도 아프다. 자신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내가 질투를 한다고 아예 그 고추를 잘라내어 버리나?

그게 아닌가? 그럼 자신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의 잔소리를 노래로 들으며 살아야 하나?

봐! 머리가 아프잖아. 또 다른 생각을 더 해보면 머리만 더 아프겠지?

 

나는 다만 몽테뉴에게서 다른 건 몰라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스스로를 탓하면서 자신에게 '바보 얼간이 같으니!'라고 중얼거리고 싶다는 데 대한 동류의식에 실로 엄청나게 흐뭇해하는 것이다. 그 유명한 철학자와 아주 조그만 문제에서라도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니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지.

그러므로 오늘밤만이라도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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