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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늙으면 왜 지겨운 사람이 될까

by 답설재 2023. 5. 7.

 

 

 

'마스크 의무 착용'이 해제되어서일까, 교육부에 들어가 맨 처음 만난 사람 중 한 명인 C가 찾아오겠다며 '쐬주 한 잔 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아달라고 했다.

모처럼 만나면 어색할까봐 그랬겠지, 우리가 다 아는 사람 둘을 대며 함께 가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네 명이 반갑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을 때 이 자리를 마련한 그에게 감사 인사 겸 근황을 묻고 싶었는데, 교육부 근무 기간이 겨우 2년 정도였지 싶은 O가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제는' '이제는' 하며 우리도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지만 그는 아예 잠시도 틈을 주지 않았다.

누가 서두만 꺼냈다 하면 말도 끝내기 전에 그가 얼른 받아서 늙으면 뼈를 조심해야 하고, 근육은 한번 생기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간다느니, 인대는 구조가 어떻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느니 하다가(의사들은 이런 얘기는 절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금세 역사 이야기로 넘어가서 자신이 정사(正史)를 부정하는 저서를 네 권이나 낸 이야기, 자신은 미술도 웬만큼은 하기 때문에 그 책의 장정을 직접 디자인한 이야기, 집 짓는 이야기, 농사짓는 이야기, 부부가 다정하게 이 고장 투어를 다니는 이야기

 

중반전까지는 내 옆자리에 앉은 그를 향해 비스듬히 앉아서 열심히 들어주었는데 그다음부터는 '이러다가 안부도 묻지 못하고 말겠구나…' 싶었고, 사람이 늙으면 온갖 경험을 다하기 때문에 할 이야기가 전혀 없는 분야는 있을 수가 없게 되고 그러면 어떤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할 말이 전혀 없는 경우는 거의 없겠다는 생각, 이러니까 늙으면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반쯤, 아니 1/10쯤, 아니 차라리 묻는 것만 대답하는 게 옳겠다는 생각 같은 걸 하고 앉아 있게 되었다.

 

혹 이 사람이 우리의 만남을 훼방 놓고 싶어서 함께 왔나 싶기도 했다.

누군가 아는 게 어찌 그리 많으냐고 했던가, 아니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지만 자신이 이야기를 다 해버리는 데 대해 뭔가 의식을 한 것이었는지 "이건 정말 중요해요!"(이 말만도 세번인가 했다) 혹은 "내가 그 부분도 좀 알고 있지요!"(그러면서 초등교사 출신은 다방면으로 광범위하게 안다는 것도 덧붙여 강조했다) "안 그래도 이 이야기는 신문에 한 번 쓰려고 했는데…" 등등 그렇게 혼자 이야기를 다 해버리지 않을 수 없는 근거 혹은 이유도 밝혔다.

 

* 확실한 것은, 말을 하지 않아 이득이 된 경우는 많아도, 말을 하여 이득이 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은 것은 언젠가 말할 수 있어도, 일단 말한 것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엎질러진 물이다.

질문받은 사람은 대답을 잘못해도 너그러이 용서받을 수 있지만, 자청하여 나서서 남의 대답을 가로채는 사람은 옳은 말을 해도 호감을 사지 못한다.

수다쟁이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질문에는 세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필요한 대답, 공손한 대답, 쓸데없는 대답이 그것이다.

 

플루타르코스의 부탁은 이것 말고도 많다. 혹 그도 수다쟁이였을까?

책을 많이 쓴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빈정거림, 비웃음, 부탁도 있다.

 

그는 「지겨운 사람들에 관한 연구」라는 글에서 지겨운 사람이 되는 갖가지 방법들과 그것을 피하는 방법들을 정리해 일곱 권으로 된 학술논문을 쓸까 생각 중이며, 그 일곱 가지 부류 중 ▶ 계속되는 변명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 ▶ 지나친 근심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 ▶ 스포츠 이야기로 지겹게 하는 사람에 관한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라고 했는데, '미완성'이라고 한 이유는 아마도 이 세 가지 유형은 따로 연구를 할 필요조차도 없는, 즉 따로 언급할 가치가 전혀 없는 부류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러셀은 또 ▶ 현학적인 태도로 지겹게 하는 사람 ▶ 일화들을 들먹이며 지겹게 하는 사람(보통 추억에 잠긴 나이 지긋한 신사들로서 그들은 이렇게 시작한다고 했다. "자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이런 일이 생각나는구먼.") ▶ 허풍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자화자찬에 따라 다시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흔한 부류는 '속물') ▶ 지나친 활기로 지겹게 하는 사람(최악의 부류로 거의 예외 없이 여자들)이 있다고 했다.

 

O는 물어보나마나 다섯 번째에 해당하겠는데, 대화 도중 끼어들었거나 어쩌다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두 시간 동안 거의 혼자 다 이야기했으니까 러셀이 보면 뭐라고 했을까? 자신의 연구를 새로 시작하겠다고 나서지나 않았을까?

 

플루타르코스, 러셀을 이야기하면 뭘 하나? 나도 수다쟁이가 아닌가?

우리는 그렇게 해서 두어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고 말았고 집에 돌아와서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초대해 준 C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싶어서 전화를 넣었더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했다.

그러기에 O를 왜 불렀느냐고 할 수는 없지. 다음에는 내가 초대하겠다고 했더니 대뜸 둘이서 만나자고 했다.

 

다음에는 내가 초대하겠다? 그럼 둘이서 만나자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C만 초청하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만났을 때 이번에는 내가 또 그 O와 같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그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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