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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책을 읽는 인간이…

by 답설재 2019. 3. 1.






책을 읽는 인간이…











    1


  두고두고 가슴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책이나 읽으면 뭐가 나온다더냐?"

  그렇게 원망한 인간, 그렇게 빈정대고 조롱한 인간, 그 인간과는 지금 헤어져서 지내고 있습니다.


  아내도, 말은 하지 않지만,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책이나 읽으며 여기까지 온 나는, 되돌아갈 수도 없어서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생각도 없이' 책이나 읽는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미안할 일 없고 부끄러울 일 없지만 단 한 사람, 아내에게는 미안합니다. 변명할 거리가 없습니다.

  나에게 그런 말을 아예 하지 않는 것도 가슴 아픕니다.


  내가 하는 짓이 같잖을 때, 아내는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그렇게 원망하면서 "그런 건 책에 나오지 않는가?" "허구한 날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는데도 어째 그 모양인가?" 그렇게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원망하는 것은 아닌지, 늘 생각합니다.



    2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1이라는 책을 읽다가 "책이나 읽으면 뭐가 나온다더냐?" "책을 그렇게나 열심히 읽는데도 어째 그 모양이냐?"에 대한 답을 발견했습니다. 완전한 답은 아니지만 반(半)쯤은 답할 수 있는 정보로 보입니다.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 자, 아무리 읽어도 인간이 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이 논리적인 글이 대변해주지 않는가!

  ― 이젠 나더러 어째 그 모양이냐거나 책을 읽으면 뭐가 나오느냐고 묻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걸 잘 알 수 있겠지?



    3


  하기야 책 따위를 읽어서 인간이 될 것 같으면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인간이 되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다면 누가 걱정을 하겠습니까? 누가 남편(아주 어쩌다가는 아내)에게 잔소리를 하겠습니까?

  저 글을 쓴 학자도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렇습니다! 시행착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시행착오를 수없이 되풀이하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기에 그건 나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할 때마다 처음 겪는 일인듯 태연하게 또 그렇게 하고 또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 문장으로 된 이 부분을 읽으며 돌연 이 학자가 좋아져서 책날개의 인물사진과 그 아래에 적힌 프로필을 망연히 바라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머지 반(半)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읽나?"

  거기에 대해서는 굳이 답을 들어야 할 것은 아닌 것이지만……. 그건 아이들더러 왜 게임을 하는지 다그치는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혹 세상에 나온 게임들을 모조리 다 해보고 싶은 아이도 있을까? 그렇다면 그런 점에서는 나도 그렇다. 세상에 나온, 그리고 나올 책들을 모조리 다 읽어보고 싶다. 불가능하다면 좋다는 책, 진짜 좋은 책만이라도…….








  1. 신형철(문학평론가), 한겨레출판, 2018, 17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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