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푸르렀던 날들

by 답설재 2019. 3. 7.

2019.1.19. 경춘선

 

 

 

카페 키토를 지나 상수역까지 걸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눈이 흩날려 시야를 가렸다. 눈을 털어내느라 걸음이 뒤처졌다. 반면 에이치의 걸음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길을 꿰고 있는 사람, 자신이 가야 할 길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걸었고 나는 뒤를 쫓았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바삐 움직였다. 고개를 들어 어두워진 하늘을 봤다. 눈보라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바람의 세기를 가늠하는 사람처럼 사거리에 잠시 서 있었다.

눈이 진짜 펑펑 오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순간 이동하는 것처럼 공중에서 펑 하고 나타나는 것 같아. 여기 펑, 저기 펑.

에이치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머리 위의 눈을 털어주었다.

시 쓰지 마.

승재는 뭐 하는 사람이야?

뉴질랜드 사람이야.

 

 

정지돈*의 소설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푸르렀던 날들이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어서 별도의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소설이 정말로 일기(日記)처럼 읽혔습니다.

정지돈은 전통적인 소설 형태를 버리고 새로운 형태로 쓰는 작가였습니다. 이 말을 쓰고 보니까 하필 그걸 느끼기가 어려운 장면을 옮긴 것 같습니다.

그의 소설을 읽고 싶었습니다.

 

 

 

...........................................................

* 정지돈 1983년 대구 출생. 2013년『문학과사회』등단. 소설집『내가 싸우듯이』경장편소설『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現代文學』 2019년 2월호 190~258 중에서 207쪽 일부.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19.03.16
푸르렀던 날들 (2) - 정영수(단편소설) 「기적의 시대」  (0) 2019.03.09
외롭게 살려고 온 사람  (0) 2019.03.03
책을 읽는 인간이…  (0) 2019.03.01
죽을 만큼 지겨운가?  (0) 2019.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