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키토를 지나 상수역까지 걸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눈이 흩날려 시야를 가렸다. 눈을 털어내느라 걸음이 뒤처졌다. 반면 에이치의 걸음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길을 꿰고 있는 사람, 자신이 가야 할 길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걸었고 나는 뒤를 쫓았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바삐 움직였다. 고개를 들어 어두워진 하늘을 봤다. 눈보라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바람의 세기를 가늠하는 사람처럼 사거리에 잠시 서 있었다.
눈이 진짜 펑펑 오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순간 이동하는 것처럼 공중에서 펑 하고 나타나는 것 같아. 여기 펑, 저기 펑.
에이치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머리 위의 눈을 털어주었다.
시 쓰지 마.
승재는 뭐 하는 사람이야?
뉴질랜드 사람이야.
정지돈*의 소설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푸르렀던 날들이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어서 별도의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소설이 정말로 일기(日記)처럼 읽혔습니다.
정지돈은 전통적인 소설 형태를 버리고 새로운 형태로 쓰는 작가였습니다. 이 말을 쓰고 보니까 하필 그걸 느끼기가 어려운 장면을 옮긴 것 같습니다.
그의 소설을 읽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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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돈 1983년 대구 출생. 2013년『문학과사회』등단. 소설집『내가 싸우듯이』경장편소설『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現代文學』 2019년 2월호 190~258 중에서 207쪽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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