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나는 그녀에게 나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그녀에게는 이미 남자친구(창동인지 어딘지 당시의 나에게는 이름부터 낯설고 아득히 먼 곳처럼 느껴지는 곳에 살고 기타를 잘 친다는)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쳐두고서라도, 그때 나는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을 말로 내뱉는 순간 그녀에게 실제와 다른 방식으로 가닿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건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그런 말이 아닌 실제로 다가가야 할 성질의 어떤 것이었다. 우리가 뭔가가 된다면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무언가, 적어도 전형적인 연애관계가 아닌 무언가여야 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러한 나의 진실된 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녀와 사귀고픈 마음이 결코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했다. 나는 결코 너와 사귀려는 마음이 없어, 나는 너의 외모나 분위기에 반한 게 아니야, 나는 너를 거저 오롯이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로서 사랑하고 있을 뿐이야, 나는 너를 성적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아…….(67~68)
(…)
이런 감정들이 나만의 것이었을까? 나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그녀가 나에게 보인 행동들, 나에게 건넨 말들, 그리고 발화가 일어난 시간, 어조, 분위기, 내가 보인 반응에 대한 또 다른 반응들……을 되짚어보며 보냈다. 나는 그녀가 보낸 메일을 스무 번씩 다시 읽으며 행간에 있는 의미를 찾아내려 노력했다 메일을 보낸 시간이 저녁 여덟 시인지, 새벽 두 시인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졌고, 그녀가 나에게 건낸 무의미해 보이는 말들도, 당시 내가 연선과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눈 이후였는지 그 전이었는지에 대해 깨달음으로써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했다. "넌 진짜 웃겨" "그때 내가 전화를 받았을 때, 처음 듣는 목소리였는데도 딱 너 같더라" 같은 말들이나, "나중에 알려줄게. 나아아중에" "넌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 같은 말들도 그랬다.(68)
(…)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을 앞둔 무렵 길을 따라 걷다가 양재천 변에 접어들어서였다. 밝을 때 걷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날은 어둑해져 있었고 우리는 밥도 먹지 않고 그냥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걷는 도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서 오랜만에 한참 웃었던 기억은 나는데 어떤 것들이 우리를 그렇게 웃게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천변에 들어서고 우리 둘은 조금 말이 없어졌고,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마라톤 복장을 제대로 차려입고 우리 곁을 달려서 지나가는 노인과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부부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그들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연선이는 성준이와 잘 지내?"(70)
정영수*의 단편소설 「기적의 시대」의 한 장면입니다.**
'기적의 시대'
얼마나 멋진 제목인가, 이 부분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기적의 시대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그게 지나가버려서 슬프게 되었습니다.
하기야 지금 그 기적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나는 지금 기적의 시대를 살아가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는 없으므로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이고, '나에게도 조만간 기적의 시대가 오겠지?' 하고 생각할 사람도 없으니까 그런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슬픔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면서도 이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들어서 이 부분을 옮겨놓고는 주제넘지만 또 '푸르렀던 날들'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누가 그 푸르렀던 날들을 알았겠는가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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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수 1983년 서울 출생. 2014년 『창작과비평』 등단. 소설집 『애호가들』.
** 『현대문학』 2019년 2월호(5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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