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타이를 맨 여인〉 1917. 캔버스에 유채. 65×50㎝. 개인 소장.
1
변함없는 충실성, 다시 말해서 변함없이 지속되는 믿음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위대하지 않다.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하는 명상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진정하지 않다. 나는 조각상들의 죽은 듯 표정 없는 눈을, 그 눈에 가득한 그 모든 고독을 생각해본다. 삶에서 멀리 물러나 있는 그 존재들만이 오로지 삶을 판단할 수 있다. 움직일 줄 모르는 그들의 부동성이 우리를 움직여 우리 자신의 밖으로 넘어서게 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그들의 맹목이 우리의 눈을 밝혀준다. 오이디푸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어 한 곳을 응시하게 한다. 안티고네를 인도하여 그녀가 아테네의 찬란한 빛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오이디푸스다.
나는 조각상들과 그림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던 그 한낮의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진정한 태양은 유리창을 통해 보이던 그 태양이 아니라 조르조네의 그림 속 들판에서의 식사와 밧세바1의 벗은 몸을 감싸던 그 태양이었다. 그때 애타게 기다렸던 만남은 어쩌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사랑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나는 밤 산책을 하면서 하늘에서 헨드리키에 스토펠스2의 어두운 두 눈과 금빛 목걸이를 찾으려고 애썼고 반짝이는 별자리들의 어지러운 선들 속에서 가브리엘 데스트레3의 깔끔한 어깨선, 시모네타4의 어렴풋한 살결을 좇아가보려고 노력했다. 그 자체가 온통 꽃이고 살인, '식물의 여신들' 속에서 피어나는 그 여인들. 그 여인들을 수없이 쳐다보고 다시 보고 난 뒤에 그 여인들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은 별빛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일과 마찬가지다.
'인간적인 것'의 이 같은 승리들에는 추위, 바람, 바다, 혹은 침묵과도 유사한 그 무엇이 깃들어 있다. (…)
『지중해의 영감』(장 그르니에)에서 옮겼습니다.5
2
"그 여인들을 수없이 쳐다보고 다시 보고 난 뒤에 그 여인들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은 별빛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일과 마찬가지다. / '인간적인 것'의 이 같은 승리들에는 추위, 바람, 바다, 혹은 침묵과도 유사한 그 무엇이 깃들어 있다."
이 글을 읽으며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떠올렸습니다. "검은 타이를 맨 여인". 이름을 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나는 그의 다른 여인들을 사랑하기는 어렵지만 그 여인은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3
흑백으로 인화해서 걸어둔 저 여인의 사진을 보며 짓궂게 물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애인이죠?"
오십여 년 전의 그 물음이 잊히지 않습니다.
장 그르니에는 여러 명의 여인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저 문장을 이렇게 고치고 싶었습니다.
"그 여인을 수없이 쳐다보고 다시 보고 난 뒤에 그 여인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은 별빛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일과 마찬가지다. / '인간적인 것'의 이 같은 승리에는 추위, 바람, 바다, 혹은 침묵과도 유사한 그 무엇이 깃들어 있다."
내가 만난 여인들은 아마도 '검은 타이를 맨 저 여인'을 닮았을 것이었습니다.
4
〈검은 타이를 맨 여인〉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불꽃 같은 사람 사랑의 조형시인』(장소현 지음, 열화당 미술문고 213)에 실려 있습니다.
이런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짤막한' 설명이 보였습니다.
모딜리아니는 많은 직업 모델 여성도 그렸는데, 이들은 개성이 없고 왠지 지루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가 잘 아는 여인들을 그릴 때는 태도가 크게 달라진다.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를 그릴 때는 그가 만든 조각의 순수한 선으로 돌아와 강인한 눈, 완고한 입, 고집스러운 턱, 뽐내는 듯한 자세 등을 표현한다. 은색 아라베스크로 장식했고, 사치스러운 모자는 우아한 취향을 보여준다.
〈검은 타이를 맨 여인〉 역시 패션을 따르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대상의 특징을 완벽하게 잡아내면서, 동시에 그 개성의 배후에 있는 인간의 영혼을 암시한다.(136, 139)
'인간의 영혼을 암시한다.'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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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약성서에서 다윗왕이 그 미모에 반해 간음하고 아내로 삼은 여인. 렘브란트가 함께 살았던 헨드리키에 스토펠스(1626~63)를 모델로 그렸다.(原株)
2. 렘브란트는 그녀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그 초상화가 남아 있다.(原註)
3. 가브리엘 데스트레(1573~99). 1591년 이후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애첩이 되어 영화를 누린 여인이다. 『목욕하는 귀부인』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녀의 언니』 등 인상적인 초상들이 남아 있다.(原註)
4. 시모네타 베스푸치(1453~76). 르네상스 시대의 귀부인. 미모로 이름을 떨침. 산드로 보티첼리 『젊은 여인의 초상』 『시모네타 베스푸치의 초상』 『봄』 『비너스의 탄생』 등.(原註)
5. 김화영 옮김, 이른비 2018, 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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