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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외롭게 살려고 온 사람

by 답설재 2019. 3. 3.

 

 

 

 

1월 말이었지? 한 종편 방송에 70년대 가수가 보였다. 애절한 저음으로 작별(作別)에 관한 노래들을 부르던 가수. 쓸쓸히, 그렇지만 괜찮다는 듯 자신의 인생을 토로하고 있었다. 공학자(工學者)였던 아버지는 월북했고, 어머니는 누나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으러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자신은 동생과 함께 외가에 남았는데 그 동생마저 일찍 죽었다고 했다. 부모에 대한 기억은 전무(全無)하다고 했다.

 

작별에 관한 노래로 한 시절을 풍미한 이가 저런 사연을 가지고 있었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아내와도 이혼하고 지인이 제공해준 소규모의 목조 '공간'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공간', 그 거처를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아서 나는 한동안 그의 인터뷰를 듣지도 않고 '저 거처는 그저 공간(空間)이라고 불러야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난방은 벽난로였다. 이혼하고 몇 년이 지나서 난생처음 자신의 신용카드를 갖게 되었고 그게 참 좋더라고도 했다.

 

그의 나들이 장면에서는 어깨에 기타가 걸려 있었고, 평소에는 그 소박한 거처의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무연(憮然)함을 느꼈는데 그는 굳이 그렇지 않다는 걸 강조하려는 듯했고 그럴수록 나는 그가 무연하게 보였다.

 

외로우려고 이 세상에 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런 사람일 것 같았다. 이런 말을 하면 그에게는 실례가 될 것이고 그가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무람해지겠지만 그렇게 보이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어느 가수가 그를 가리켜 '오빠부대'의 그 "오빠!!!"의 원조(元祖)가 바로 그라고 했다. 그러면 뭐 하겠나. 외로우려고 온 사람에게는 철새처럼 몰려왔다가 철새처럼 떠나는 그런 여성들 말고 그리 길지도 않은 세월을 애틋하게 여기고 바라보아도 좋을 '어머니'조차 일찍 떠나는 것 같았다.

 

'어머니조차'. 애틋하게 여기고 바라봐주어도 좋을 어머니조차 떠나가버리고, 한 사람이 불러볼 수 있는 이름으로는 '마지막'처럼 여겨지는 어머니조차.

그는 그걸 부정하고 싶어서, 나는 결코 그렇게 하여 외로워진 사람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서 '나는 애초에 외롭게 지내다 가려고 온 사람'이라는 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나로서는, 그렇다. 그가 부른 노래들이 있어서, 그 노래들은 그대로여서 그가 더 외롭게 보였다. 물론 그 노래들이 다 사라지고 없다면 그는 더욱 더 외로울 것이지만, 그 노래들이 그대로 있는 지금도 그만하면 충분히, 더할 수 없이, 너무나 외롭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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