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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윤문(潤文)

by 답설재 2019. 1. 26.

 

 

 

 

 

 

   1

 

윤문 요청이 왔습니다.

초등학교 수석교사인데 어느 신문에 기고할 글이라고 했습니다.

 

윤문은 귀찮은 일입니다. 심지어 내 글조차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읽고 또 읽고, 고치고, 또 고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해서 마침내 송고하게 됩니다.

남의 글 윤문이라니, 잘해서 빛나는 글이 되어봤자 내 이름이 빛날 것도 아니고, 좋은 글이 되었다며 원고료 일부를 받으라고 할 리도 없습니다.

원고료가 탐이 나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귀찮을 뿐입니다.

 

 

    2

 

윤문 요청이 왔을 때 싫건 좋건 거절한 기억도 없습니다.

상대방이 보면 별 것도 아닌 일로 관계를 끊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상황대로 일을 해서 부치게 됩니다.

 

'상황대로'라는 표현은 이 경우에는 중요한 말입니다.

원고가 90점짜리이면 적어도 95점짜리를 만들어서 보내게 되고, 70점짜리이면 적어도 80점, 90점짜리를 만들어 보내야 합니다.

그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70점짜리를 95점짜리로 바꾸어 보내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 봤자 그건 윤문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필자가 '이건 내 글이 아니잖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많이 고치면 그건 윤문이 아니라 개고(改稿)가 될 뿐만 아니라 그만큼 힘이 많이 들어가고 골치가 아픈 '대수술(작업)'이 될 것입니다.

 

 

    3

 

윤문 요청을 받은 글의 일부분입니다. 또 그 아래는 이 부분을 윤문한 글입니다.

 

 

권력은 겸손하게 그 자리에 있는 것이지 자기 힘을 남용하고 즐기라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리더는 나 자신이 과연 권력을 남용하는 부분은 없는지 자리가 힘이라고 생각하고 구성원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섬김을 받는 것은 아닌지,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묻고 또 묻고 확인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한 가정의 리더나 직장의 리더는 리더로서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리더로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모든 일들이 공동체 전체에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권력은 겸손하게 행사하라고 주어지는 것이지 그 힘을 남용하거나 즐기라고 주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리더는 나 자신이 과연 권력을 남용하는 부분은 없는지, 자리가 힘이라고 생각하여 구성원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김을 받는 것은 아닌지,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 옳은 것인지 묻고 또 묻고 확인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가정의 리더나 직장의 리더는 리더로서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리더로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모든 일들이 공동체 전체에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4

 

윤문 시간은 10분? 15분?

이튿날 아침, 이런 메일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첨삭하여 보내주신 글을 꼼꼼히 읽으면서 글자 하나, 획 하나를 바꾸었는데

글 읽음이 훨씬 수월해진 걸 발견했습니다.

마치 흐르는 시냇물의 모퉁이에서 돌 한 개를 들어내니 물의 흐름이 부드러워짐과 같습니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교육과정에서도 수업자의 마음을 읽으며 이루어진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자꾸 유행에 편승하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아, 이런!

윤문에 정성을 더 기울였어야 했습니다.

그 정도의 작업에 이런 찬사를 보냈으니…… 염치가 없고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배는 떠났습니다.

그가 다음에 또 윤문 요청을 해오면 그때는 점수를 더 높이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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