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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063

책을 읽는 이유 법률가가 되겠다고 혹은 되었다고 법만 들여다보고, 의사라고 해서 의학서적만 들여다보고, 교육자라고 교육학만 읽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싶습니다. 숨 막힐 것 같으니까요. 하기야 단돈 만 원도 아까운 책도 많습니다. 독서를 많이, 혹은 잘 했다고 아이들에게 상을 주면서 .. 2009. 5. 1.
봄 편지(Ⅳ) ; 포기 여자대학 봄 교정에 가보았습니까? 그냥 교정 말고 학생들이 가득한 그런 교정. 무슨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이화여자대학교 후문에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그 언덕길에 차를 세우고 어느 건물인가 싶어 표지판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합동으로 무슨 행사가 열렸는지, 그 학교 수천 명 학생이 한꺼번에 .. 2009. 4. 18.
봄 편지(Ⅲ)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요즘은 왠지 짜증날 일이 자꾸 생깁니다. '내가 이러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가는데, 잘 돌아가는 걸 봤는데,' 그렇게 생각해도 다시 짜증이 나고, 이렇게 좋은 봄인데도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그런 제목으로 온 메일을 읽으며 오늘 아침의 짜증을 가라앉혔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작은 이.. 2009. 4. 2.
봄 편지(Ⅱ) 가벼웠고, 들떴기 때문일까요, 봄이 왔다고? 눈이 내립니다. 우산을 받치고 오는 아이들이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저들은 영원히 예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천사백 명이 제 손자․손녀인 것 같은 이 느낌은 나의 자산이고 내 나름대로는 지난했던 삶에 대한 보상이고 위로일 것입니다. 저 아이들은 이런 나를 알고 있을까요? 저 아이들이 떠들었다고 선생님께 혼이 나는 것조차 나는 싫습니다. 운동장 건너편 나뭇가지에도 눈이 붙어 벚꽃이 만발한 것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잠깐은 벚꽃이 핀 줄 알았습니다. 그저께는 강릉 초당동에 있는 강원도교육연수원에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대관령에서 눈 내린 겨울 산을 그린 산수화 속의 그 늠름한 산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봄인 줄 알았더니…….’ 진달래 대신 눈 쌓인 산의 모습을.. 2009. 3. 26.
봄 편지(Ⅰ)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봄의 어느 아침, 꽃들을 가득 달고 벚나무가 서 있다. 그 하얀 꽃들은 그 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 꽃들은 침묵을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빛이 되었다. 새들이 그 나무에서 노래했다. 마치 침묵이 그 마지막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쳐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 침묵의 음(音)들을 쪼아 올리는 것이 새들의 노래인 것 같았다. 나무의 푸른빛 또한 돌연히 나타난다. 한 나무가 다른 한 나무 곁에 푸른빛으로 서 있는 모습은 그 푸른빛이 침묵하면서 한 나무에게서 다른 한 나무에게로 옮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대화할 때 .. 2009. 3. 18.
우리 아파트 홍중이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내애가 제 친구와 헤어지면서 고래고래 떠드는 소리가 지하 2층까지 내려옵니다. 5학년짜리 홍중입니다. 우리 동(棟)에는 그 애 말고는 그럴 애가 없으니까요. 언젠가 “할아버지, 오늘은 더 멋지게 보이세요.” 해서 저를 우쭐하게 했던 그 아입니다.1) 로비 층에서 홍중이가 자전거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인사에 이어 숨가쁘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저 8월에 미국 간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응? 뭐라고? 미국이라니! 얼마 동안?” 빅뉴스를 들은 척해주었습니다. “3주간요.” 그러더니 벌써 섭섭해진다는 표정으로 덧붙였습니다. “……그동안 할아버지를 못 뵐 것 같아요.” (별 걱정이야, 내 참...) “그렇겠네? 누구하고 가?” “영어학원 원장님요(그 애는 내가.. 2009. 3. 15.
다시 먼 나라로 떠난 딸을 그리워함 조용하면 생각납니다. 그럴 때는 이곳이 적막해집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그럴 때는 괜찮습니다. 생각나게 하는 건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가령, 영국이라는 나라가 그곳에 있을 서쪽하늘은, 언제 어디서나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난 1월 4일, ‘한국의집’에서 혼례를 치른 딸이 또 이 나라를 떠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그 두 달 간 하루하루는 참 잘 갔는데 한 달, 또 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어서 아득해졌습니다. 옛적에 있었던 일 같습니다. 우리 학교 H선생님은 제 글 「먼 나라로 살러가는 딸과 작별하고」(2007.12.18)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D시의 후배 K교장은 그의 아들이 혼례식에 대신 참석했는데 신랑은 옥스퍼드 출신, 신부는 캠브리지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기가 죽었더라고 했습니다. .. 2009. 3. 2.
기억하고 싶은 기사 "金 추기경 신드롬" 기억하고 싶은 기사를 보았습니다. 지나고 나면 또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싸우고 으스대고 억누르고 질시하고 갈라지고 그러겠지만, 그럴 때 이런 모습도 있지 않았느냐고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은 기사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 추모에 관한 기사입니다(조선일보, 2009.1. 9. 1, 4면). 기사 제목은「갈라졌던 우리, 하나 되는 계기로」작은 제목들은「이념·계층·종교 초월한 추모 행렬… ‘金추기경 신드롬’」「새벽 6시~子正까지 20만 넘는 조문인파」였습니다. 2009년 2월 21일, 오늘 오전 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 특별중계방송을 보았습니다. 명동성당에서 줄의 맨 끝까지 걸어가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조문 행렬은 가톨릭회관을 둘러 삼일로 언덕배기 길을 지나서도 계속됐다. 세종호텔에서.. 2009. 2. 20.
정민표 『내 인생 1막 1장』 1 정년이 되면 무언가 남기고 싶어들 합니다. 그렇지 않을 리 없습니다.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직원들과 식사라도 할까? 다른 사람도 좀 부를까? 더러 꽃다발이나 선물 같은 걸 가지고 오겠지? 장소를 구해서 아예 퇴임식을 할까?……. 문제는, 폐를 끼치고 부담을 준다는 데 있습니다. 그 부담을 줄이려고 하겠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됩니까? 그래서 조용히 마지막 퇴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에게 넌지시 물어보면 "그러면 됩니까! 교장 선생님이야말로 꼭 퇴임식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교장 선생님이야말로?' 남들도 다 그런 말을 들을 게 분명합니다. '이 사람은 나를 진정으로 생각해주는 말을 하고 있나?' 흘낏 쳐다보고 또 생각합니다. '당사자에겐 심각하지만.. 2009. 2. 19.
젊은 스승에게 큰절 하던 노인 상주군교육청에 파견근무를 할 때였습니다. 교사가 된지 6년째에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 근무를 하게 되었고 이듬해에 혼자 시범수업을 해서 유명해졌을 때였습니다. 유명해진 이유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시범수업 외에도 6학년을 담임하면서 잔디 파와서 심기나 각 교실을 제외한 학교 환경구성을 도맡았고 -옥상 위의 '주체성이 확립된 국민 육성' 같은 간판도 직접 써 붙여야 할 때였습니다-, 학습자료전시회 출품도 하고, 전국현장교육연구대회에서 1등급 푸른기장을 2년째 연속으로 받았고, 연구학교보고서도 썼습니다. 경력이 쌓여야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경력이 쌓이면 힘이 빠진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걸 한꺼번에 다 하면서 소주도 많이 마셨습니다.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면서 선친께서 독사를 잡아왔기 때문에 .. 2009. 2. 16.
‘이메일을 막는 회의’와 댓글을 보고 싶은 욕구(수정 원고)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함수곤 교수는 제가 교육부 편수국(교육과정, 교과서 업무를 맡아보던 곳)에 들어갔을 때 편수국장이었습니다. 당시 이화여대 교수였던 분이 장관으로 와서 이러저러한 지시를 하자 그 지시가 부당하다며 덜컥 사표를 냈고, 그렇게 좀 쉬다가 일본으로 건너간지 1년 .. 2009. 2. 12.
외손자 선중이 Ⅰ 선중이는 제 외손자입니다. 곧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갑니다. 둘째 딸이 낳았습니다. ‘선중(宣中)’이라는 이름은 제가 지었습니다. ‘가운데에 펼쳐라’, 다른 이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거기에는 제 희망과 기대, 욕심이 들어 있습니다. 제 핸드폰 앨범에는 그 애 사진이 대부분입니다. 조용할 때 들여다보면 사진 크기가 작아서 안타깝고 그 애가 더 그리워집니다. 그 애는 좀처럼 전화를 하지 않습니다. 며칠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막막한 느낌입니다. 내가 이런데도 그 애는 전화를 하지 않으니 참 무심한 아이입니다. 설에 다녀갔고, 그 얼마 전에 며칠 머물다 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전화를 기다리지는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아주 오래 된 것 같습니다. 전에는 우리와 함께 지내고 싶어 하면서도 제 부모와 헤어져 있는.. 2009.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