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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다시 먼 나라로 떠난 딸을 그리워함

by 답설재 2009. 3. 2.

 

 

조용하면 생각납니다. 그럴 때는 이곳이 적막해집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그럴 때는 괜찮습니다.

생각나게 하는 건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가령, 영국이라는 나라가 그곳에 있을 서쪽하늘은, 언제 어디서나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난 1월 4일, ‘한국의집’에서 혼례를 치른 딸이 또 이 나라를 떠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그 두 달 간 하루하루는 참 잘 갔는데 한 달, 또 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어서 아득해졌습니다. 옛적에 있었던 일 같습니다.

 

우리 학교 H선생님은 제 글 「먼 나라로 살러가는 딸과 작별하고」(2007.12.18)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D시의 후배 K교장은 그의 아들이 혼례식에 대신 참석했는데 신랑은 옥스퍼드 출신, 신부는 캠브리지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기가 죽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자랑이겠습니까. 저는 아무래도 H선생님 쪽입니다.

 

그 애는 제가 꼼짝만 해도 왜 그러는지, 다 알아챕니다. 그 애와 한자리에 있으면 고위관리의 집무실에 들어가 있을 때처럼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그 애가 깻잎 5장, 상추 10장을 하나하나 세어서 차려주던, 사람을 꼼짝도 못하게 하는 그 밥상이 그리워집니다.

 

그 애하고는 세상일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가령 경제정책에 대해 금방 읽거나 들어서 아는 얄팍한 지식을 이야기한다면 그 애는 자신의 전공은 ‘국제교육’이지만 당장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같은 이야기들을 생각할 것입니다.

 

제게 담배를 끊거나 줄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그 애뿐입니다. 그 애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합니다. 왜 아빠가 그렇게 많이 마시던 술은 이제 마시지 않게 되었는지 물으며, 제 몸이 말을 잘 듣지 않게 된 걸 안타까워합니다. 제게는 말하지 않고 제 어머니에게만 말합니다.

제 아내는 꼭 이렇게 덧붙입니다. “성격이 빼닮았으니까.” 그런 말은 언짢은 일이 있을 때 흔히 듣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그렇기도 한 점이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애 부부가 한국에 와서 살면 좋겠습니다. 한국에는 일자리가 없어서 영국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 애가 잘 살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끔 생각하지만 제 아내는 자주 눈물겨워하니까 제 아내의 그 기원만큼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의 기원만으로도 부족할지 모릅니다.

 

잘 한 건 단 한 가지도 없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또 하나의 죄를 짓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다만 그 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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