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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기억하고 싶은 기사 "金 추기경 신드롬"

by 답설재 2009. 2. 20.

 

다큐멘타리 "바보야"(2011)

 

 

기억하고 싶은 기사를 보았습니다. 지나고 나면 또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싸우고 으스대고 억누르고 질시하고 갈라지고 그러겠지만, 그럴 때 이런 모습도 있지 않았느냐고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은 기사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 추모에 관한 기사입니다(조선일보, 2009.1. 9. 1, 4면). 기사 제목은「갈라졌던 우리, 하나 되는 계기로」작은 제목들은「이념·계층·종교 초월한 추모 행렬… ‘金추기경 신드롬’」「새벽 6시~子正까지 20만 넘는 조문인파」였습니다.

2009년 2월 21일, 오늘 오전 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 특별중계방송을 보았습니다.

 

명동성당에서 줄의 맨 끝까지 걸어가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조문 행렬은 가톨릭회관을 둘러 삼일로 언덕배기 길을 지나서도 계속됐다. 세종호텔에서 명동 지하철역 출구를 거쳐 명동 상가구역으로 꺾어 들어간 뒤에도 줄은 연결됐고, 다시 U자 곡선을 그리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이어졌다. 이 줄 속에서 이윤정(이화여대 문헌정보 4년)씨는 경기도 광명의 집에서 소설책을 들고 와 혼자서 3시간 동안 책을 보면서, 한석원(50․서울 길동) 씨는 “추기경님이 우리 곁에 계셨다는 걸 아이에게 기억시켜주고 싶다”며 어린 외손녀의 손을 잡고 긴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18일 쌀쌀한 날씨 속에 새벽 6시부터 자정까지 조문 행렬은 끊기지 않았고, 이날만 20만 명이 이 줄 속에 서 있었다. 이렇게 ‘길고 조용한’ 인파의 줄을 본 적이 없다.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털모자와 마스크까지 쓰고 호주머니에 언 손을 집어넣고, 가끔 할머니들은 아픈 다리로 잠시 주저앉아 쉬기도 하면서, 이 많은 사람이 마치 없는 것처럼 행렬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잘 기다릴 줄 알았던가. 택시기사, 구멍가게 주인, 건어물 상인, 회사원, 교수, 학생, 무직자들이 섞여 다섯 시간 이상 줄을 서면서, 어느 한 쪽 구석에서 소란과 새치기가 없이, 짜증과 조바심을 내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줄은 가톨릭 신자만의 줄도 아니었다. 불교신자인 정병권(62)씨는 “종교를 떠나 위대한 어르신이라 찾아왔다. 나라를 위해, 서민을 위해 일생을 사신 그분이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조문을 위해 다섯 시간 이상 줄 서서 기다렸다. 56년간 기독교를 쭉 믿어온 이모(69) 씨도 “촌 할아버지 같이 소박하고 맏형 같은 추기경님의 인간적인 면에 매혹됐다”며 “종교가 달라도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나누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최보식 선임기자   congchi@chosun.com

 


삼일로 고개 위에 위치한 ‘삼일로 창고극장’ 단원들은 플라스틱 간이 테이블 두 개를 펼쳐놓고 조문객들에게 화장실을 제공하고 따뜻한 녹차를 나눠주고 있었다. 극장대표 정대경(50)씨는 “추기경을 조문하기 위해 줄을 선 이들을 위해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봉사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바깥 거리로 길게 이어지는 조문의 행렬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용한 혁명’을 보는 것 같았다. 정치권력이나 경제적 부(富)로도, 또 선전 선동과 강압의 세력으로도, 이런 광경을 만들 수는 없다. 이념과 빈부, 세대, 종교의 차이를 넘어 모두를 통합하는 힘은 다른 데 있음을 김 추기경의 선종(善終)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문의 줄에 서 있던 불교신도인 김영희(58)씨는 “마치 아버지를 잃은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없이 베푸시고 어떤 사람들과도 벽(壁)이나 차별 없이 대하시는 모습이 너무 존경스럽다”고 덧붙였다. 저 숱한 사람들을 움직이고 끌어들이는 힘은 사회적 약자와 빈자들에 대한 사랑, 온유함과 관용을 실천하는 쪽에 있었는지 모른다. 서울 청량리에 사는 장두호(70) 씨는 “1979년 명동성당에서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을 때 추기경님께서 나오셔서 정부측 인사에게 ‘서로 자제하자’며 중재하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게 참 인상적이었다. 우리 사회 충돌의 현장에서 균형을 잡고 조화를 이뤘던 큰 어른”이라고 회상했다. 김 추기경의 빈소가 차려진 명동성당은 스스로 원하지는 않았지만, 종종 시국갈등의 현장이 되곤 했다. 보수와 진보의 대결, 계층간의 반목, 세대간의 불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용산철거민대책위원회도 이 부근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하지만 이제 이곳으로 이념과 빈부, 세대, 종교의 차이를 떠나 지난 17일엔 9만명, 18일엔 10만명의 조문객이 모여들었다. 명동성당 건너편 인도에서는 재단법인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가 책상 두 개를 붙여놓고 장기기증에 대한 팸플릿을 나눠주고 있었다. 이 관계자는 “오늘 하루만 60명 정도가 장기기증을 서역했다”며 “어떤 분은 ‘추기경님이 하셔서 나도 해야겠다’며 신청하더라”고 했다. 한 고귀한 인간의 ‘작은’ 행위가 세상을 얼마나 많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인가. 5시간 이상 줄을 섰던 조문객들이 마침내 명동성당 구내로 들어섰다. 오른쪽으로 김 추기경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과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보면서.

                                                                                        (사회부 김정민, 박순찬, 이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