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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정민표 『내 인생 1막 1장』

by 답설재 2009.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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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 되면 무언가 남기고 싶어들 합니다. 그렇지 않을 리 없습니다.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직원들과 식사라도 할까? 다른 사람도 좀 부를까? 더러 꽃다발이나 선물 같은 걸 가지고 오겠지? 장소를 구해서 아예 퇴임식을 할까?…….

 

문제는, 폐를 끼치고 부담을 준다는 데 있습니다. 그 부담을 줄이려고 하겠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됩니까? 그래서 조용히 마지막 퇴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에게 넌지시 물어보면 "그러면 됩니까! 교장 선생님이야말로 꼭 퇴임식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교장 선생님이야말로?' 남들도 다 그런 말을 들을 게 분명합니다. '이 사람은 나를 진정으로 생각해주는 말을 하고 있나?' 흘낏 쳐다보고 또 생각합니다. '당사자에겐 심각하지만, 보내는 사람들로서는 성가실 뿐이지. "아, 이제 보냈구나. 괜히 정년을 앞둔 교장을 만나서 힘들었네" 그러겠지.'

 

 

    2

 

조용히 마지막 퇴근을 하고 마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깊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섭섭해서’ 문집이라도 발간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어쩌면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누가 그런 문집을 읽고 감동을 받습니까? 그냥 측은하기만 하지요. ‘대접’ 받는 정년기념문집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설사 “아, 대단한 인물이구나!” 하면 뭘 합니까, 이미 정년인데.......

 

그런데도 만듭니다. 한 동기생은 제목이 금박으로 찍힌 4×6배판 600쪽 가까운 커다란 책을 냈습니다. 제1장은 축시, 축사, 축서, 축화로 꾸며졌고, 제2장은 다른 사람들의 글, 제3장은 돌아본 인생 60여 년, 제4장은 자신의 글이 발문, 수필, 교단수기, 여행기, 주례사, 제문, 편지글, 훈화, 축사, 논단으로 이어집니다. 게다가 가계, 선조의 사적, 교단에서의 발자취, 추억의 영상, 가족사진, 교육활동 사진 등으로 된 부록도 있습니다. 빠진 게 없습니다.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경탄할 수밖에 없지만 제 글도 들어 있는 그 문집을 언제까지 보관할지 모르겠습니다.

 

 

    3

 

교수들의 문집은 비교적 수준이 높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글만으로 발간하고 어떤 이는 다른 교수의 글과 자신의 글을 모아 만듭니다. 본인이 나서서 만든 것으로 하지 않고 대체로 ‘○○(아호) ○○○ 교수 정년기념문집간행위원회’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나 그냥 기념문집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교장들도 유사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글과 교사들의 글, 학부모의 글, 심지어 아이들의 글까지 모은 ‘혼합식’ 문집입니다. 내용은 뻔하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 교장은 훌륭한데 정년이 되어 아쉽다. 앞으로 건강하게 지내라’ 그 정도니까요. 대체로 가족사항, 훈장 사진까지 넣어서 거기에는 그가 어떤 태몽으로 태어났는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그런 문집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출판사 사장은 영업을 잘 아니까 “이건 판매할 수준이 아닙니다!” 혹은 “이런 책은 팔리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말리면 좋을 일이지만, 본인이 퇴직금 일부를 털어 출판한다고 덤벼들면 말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난 연말에는 표지에 ‘삶의 지혜가 담긴 인생 가이드’ ‘한 권의 좋은 책은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합니다’ ‘깨어 있는 자들이여! 여기! 知性人을 위한 지혜의 메아리, 가슴으로 말하는 眞理의 소리가 있다’고 소개한 책을 받았습니다. ‘이 좋은 책 두 권 한 세트를 졸업생들에게 선물하면 좋을 것’이라는 안내장도 들어 있었습니다. 글의 제목들은 이렇습니다. ‘내일을 보는 등불’ ‘자신은 보석 같은 존재’ ‘인생은 입지에서’ ‘인생은 시간이다’ ‘아는 것이 힘’ ‘운명은 개척하는 것’…….

아시겠지요? 그런 제목의 글이 80편 정도씩 들어 있었습니다. 그 퇴직 교장이 참 딱하고 안쓰럽습니다. 따지고 보면 저도 그런 글을 쓰고 있으니 그에게는 미안한 일입니다.

 

 

    4

 

그런데 이번에 가슴이 ‘철렁’한 문집 한 권을 받았습니다. 정민표 교장 정년기념『내 인생 1막1장』. 그는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늘 그 자리에 있으므로 언제라도 연락하면 된다고 여겨온 친구입니다. 저와 키도 비슷할 뿐만 아니라 재미있고 다정하고 활발하고 열정적인 교육자입니다. 어떤 얘기라도 할 수 있고,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가 근무하는 학교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갔다고 자랑을 늘어놓아도 하나도 고깝지 않고 ‘그것 참 잘 됐다’ 싶었습니다.

 

그 문집도 ‘전형적’이었습니다. 제1장 살아온 이야기, 제2장 각종 연수자료 모음, 제3장 좋은 글 모음. 다른 퇴임 교장의 문집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내용들인데도 ‘그래, 정민표다운 문집이구나’ 했습니다. 그 평범함에서 오히려 강한 느낌을 받아서 오랫동안 자꾸 들여다봤습니다.

 

“약관 20대 초반에 교직에 몸을 담았고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사십 년이란 긴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생각해보면 꼭 선생님이 되어 페스탈로치처럼 위대한 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이나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해서 나라에 공헌하겠다는 사명감으로 교직을 선택했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저 가난해서 하루속히 직업을 얻어 생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선택했던 것이 교육대학 진학이었고 그로 인해 교직생활을 시작했던 것이 벌써 정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바로 내 이야기 같은 머리말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1막1장’과 ‘1막2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은 저녁놀 같은 화려함 때문에 목이 메었습니다.

  

“그렇다. 앞으로 10년이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일에 얽매이지 않고, 건강은 받쳐주고, 연금으로 노후생활은 보장되고, 그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스케줄을 짜서 생활할 수 있는 이런 생활이야말로 내가 꿈꾸어왔던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그동안 못해보았던 일들(영어회화, 컴퓨터, 사진, 여행, 요리, 골프 등)을 하나하나씩 배워가며 즐거운 생활 행복한 인생이 되도록 제2의 인생 설계를 착실히 실천해나갈 것이다. 인생 1막1장은 이제 그 막을 내리고 인생 1막2장을 시작하려고 하니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벅차 자꾸만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5

 

‘정말 그런가.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러 가는 것인가.’

저는 그 ‘화려한’ 구상이 결코 화려할 수 없는 여정(旅程)의 ‘화려한 표현’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는구나!’ 그답게 후배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가르쳐야 한다는 부탁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도 가는구나!’

 

그가 ‘인생의 황금기’가 될 것이라고 표현한 기간은 황혼기를 맞이한 자의 자기연민과 덧없음을 이야기하는 다른 말, 혹은 공연한 자기과시 같은 게 아닐까요? 그래서 가식 없이 고백합니다. 그의『내 인생 1막1장』과 ‘1막2장’에 대한 저의 이 해석은, 그와 저 자신에 대한 저의 이해이고, 해결할 수 없는 슬픔이며, 안쓰러운 사랑입니다.

 

‘친구여, 사실은 우리 이제 어디로, 어디를 가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지나간 길을 외면하지 않고 남은 계절을 지켜볼 것이다. 헤어날 길 없는 연민, 절망, 비애뿐이라 하더라도 그대가 가는 길을 더듬으며. 사랑하는 친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