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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165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지 못하는 것 나는 마침내 가시 철망들을 통과하여 폐허 사이에 와 있었다. 그리하여, 평생에 한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 그리고 그 이후로 그 삶은 한껏 은혜 입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그러한 장엄한 12월의 햇빛 아래서, 나는 정확히, 내가 찾으러 왔던 것, 그 시대와 그 상황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나에게만 제공된 것, 그 버려진 자연 속에서 정말로 오직 내게만 제공된 것을 발견하였다. 올리브나무들로 가득 뒤덮인 공회소로부터 차츰 저 아래 마을을 볼 수 있었다. 마을로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투명한 대기 속에서 몇 웅큼의 연기가 솟아올랐다. 쉬임없이 쏟아지는 눈부신 차가운 햇빛 아래 숨이 막힌 듯, 바다 역시 고요했다. 세누아로부터 오는 먼 닭 울음 소리만이 오래 가지 못하는 낮의 영광을 축하.. 2011. 5. 11.
1등급 학생들은 스스로도 잘해낼 수 있네 에릭 홉스봄이 젊은 날 그의 스승에게서 들은 충고랍니다. "자네가 가르쳐야 할 사람들은 자네처럼 총명한 학생들이 아니네. 그들은 2등급의 바닥에서 학위를 받게 되는 보통 학생들이야. 1등급의 학생들을 가르치면 흥미는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 잘해낼 수 있네. 자네를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보통 학생들이란 것을 잊지 말게." ◈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한다는 건 대체로 학생들의 사고 활동을 불러일으키고 그 과정과 결과로써 대화를 주고받으며 다시 더 깊은 사고의 골짜기나 더 넓은 사고의 들판으로 데리고 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말을 잘 하는 아이들을 주 대상으로 하기가 쉽게 됩니다. 그런데 홉스봄은 1등급 아이들과 어우러져 뒤쳐진 아이들에게 "실례를 저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1등급인 아이들은 교사.. 2011. 5. 9.
오바마, 어디 앉아 있나요? 그야말로 '자고나면' 한국교육을 칭찬하고 부러워하는, 한때 그 대한민국의 교육자였던 저로서는 그 칭찬과 부러움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그 오바마 대통령이 보이는 사진입니다. 빈 라덴을 사살하는 일이니까 심각한 표정들입니다. 저 사진을 본 이튿날 신문에는 무장도 하지 않은 빈 라덴을 죽인 건 비신사적이어서 문제가 된다는 투의 기사도 보였습니다. 저로서는 그런 건 모를 일입니다. 9·11 테러 행위 때는 미국인들이 무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빈 라덴 측에서 테러를 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빈 라덴의 저택에 들어가보고 "에이, 무장도 하지 않았네." 하고 되돌아 나오거나 "어이, 이것 봐! 얼른 무장을 하든지, 아니면 순순히 이 오랏줄을 받아!" 했어야 한다는 뜻인지 알 수가 없다는 .. 2011. 5. 6.
나는 당신에게 장미향수를 주었건만 당신은 내게 독을 주었네 그(녀)가 내게 독(毒)을 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알고 보니까 장미향수였다면, 고전적이면서도 교훈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다. 또 장미향수를 받은 사람에게는 감동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장미향수를 주었으므로 상대방도 내게 장미향수를 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독이었다", 그런 일도 있을 것 같다. 아니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지난번에(아, 이런... 이미 3개월 전이네!) 『우리에게도 더 좋은 날이 되었네』를 얘기한 그 음반에는 「당신이 마실 장미향수를 주겠네」라고 표시된 것이, 다른 음반을 찾아봤더니「나는 당신에게 장미향수를 주었건만 당신은 내게 독을 주었네」로 표시되어 있는 걸 봤다. ① '당신이 마실 장미향수를 주겠네.' ② '나는 당신에게 장미향수를 주었건만 당신은 내게 독을 주.. 2011. 4. 24.
가련한 우리말 가련한 우리말 Ⅰ "이날 ○○○은 데뷔 전부터 화제를 모은 금발의 헤어와 비비드 컬러의 펑키한 의상으로 브리티시 록이란 장르를 어필했다." 새로 쓰이는 외래어로 말하면 '인터넷 서핑(internet surfing)'을 하다가 발견한 기사의 한 부분입니다. '참 나쁜 사례구나!' 하고 착각하지는 마십.. 2011. 4. 19.
독서, 너만은! 독서, 너만은! Ⅰ 2011.3.22.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발견한 아이입니다. …………. Ⅱ 책에 대해 말할 때 흔히 하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왜 읽는가?" "왜 읽어야 하는가?" '왜 읽는가?'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가령 이런 대답들입니다. "재미있어.. 2011. 4. 17.
봄! 기적(奇跡) 봄! 기적(奇跡) ♣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싶었습니다. 재해는 갈수록 험난하고, 정치, 종교, 교육, …… 우리가 더 잘 살아가려고 하는 일들로 인한 갈등이 까칠하게 느껴져서 때로는 그런 것들이 '왜 있어야 하는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이 봄날, 그런데도 햇살은 야.. 2011. 4. 13.
"初夜? 이렇게 해보세요" "初夜? 이렇게 해보세요" Ⅰ 2003년 어느 날 일입니다. 교육부에서 근무할 때였는데, 아침에 장관실에서 들어갔더니 혼잣말처럼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교육을 줄이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아침 신문을 살펴보다가 접으며 푸념처럼, 넋두리처럼 불쑥 던진 교육부 수장의 그 질문에,.. 2011. 4. 11.
다시 온 봄 겨우내 눈밭에 뒹굴어도 괜찮을 만큼 '튼튼한' 점퍼 한 가지만 입고 지냈다. 문밖에만 나서면 '무조건' 그 옷을 입었고, 더구나 털모자까지 뒤집어썼다. 한심한 일이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69년 봄부터 딱 41년, 출근을 하는 날이면 '무조건' 정장을 하다가 그렇게 하자니 어색했지만, 그것도 며칠이지 곧 익숙해졌다. 이월에는 복장을 좀 바꿔 볼까 했다가 그만둔 건 신문기사 때문이었다. '봄이 왔다는 말을 믿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까짓 거'? 그렇게 가소롭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핏줄에 스탠트라는 걸 집어넣었으니 이젠 괜찮겠지' 했는데 몇 달만에 다시 실려가 그걸 또 한 번 집어넣고 나니까 이건 예삿일이 아니었고, '내 핏줄은 걸핏하면 좁아질 수 있구나' 싶어 지레 .. 2011. 4. 2.
천안함 생각 「국민 80% “천안함은 北 도발" 정부 1주기 설문조사」, 2011년 3월 23일 한 석간 1면 하단에서 본 기사입니다(어제 조간에는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짧은 기사여서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화일보, 2011.3.23.1면).   우리 국민 10명 중 8명은 천안함 피격이 북한의 도발에 의해 발생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절반 이상이 현재의 안보 상황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오는 26일 천안함 피격 사건 1주기를 맞아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 17일 전화여론조사를 실시, 이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23일 밝혔다.  김영번기자 zerokim@  「국민 80% “천안함은 北 도발"」  이 제목은 다음 중 어떤 의미를 지닌 .. 2011. 3. 25.
장난스런 기사 제목 어느 신문에선 흔히 기사제목의 한자어를 임의대로 고쳐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1 「모금운동·애도열기 후끈… '지구촌 日치단결'」 규모 9의 대지진과 쓰나미, 원전(原電) 방사선 유출 사태로 인한 피해 상황이 극에 달한 일본에 대해 전세계적으로 구호의 손길이 열기를 띠고 있다는 내용이다.日치단결? 일간신문에서 기사 제목을 그렇게 붙여도 좋은지 의문이다. 장난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비교육적이고,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 날짜 그 신문에서는 이런 식의 제목을 하나 더 찾을 수 있었다. 「'東日本 대지진' 여파로 급락하더니… 원자재값 일제히 '高高' : CRB상품지수 10.43P↑, WTI·금 가격 등 급등」 '高高', 원자재값이 치솟는다는 뜻이니 굳이.. 2011. 3. 24.
후줄근하고 추레한 동기생들 대학 동기생 모임을 하면 매번 대여섯 명 정도가 모여 식사를 한다. 한때 교육자였고 피끓는 열정을 토로할 줄도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럴 일도 없고 아니 아무런 일도 없고 있을 것도 없고 그래서 아무 일도 아닌 이야기를 나 혼자라도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대부분 건강해서 나보다 십여 년씩은 더 살겠지만 저들도 후줄근하고 추레하긴 마찬가지다. 정장을 할 필요가 거의 없게 된 것만 해도 그렇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더 정성들여 들어 주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280명인가가 함께 졸업했다. 우울했으나 지금보다는 찬란했던 시절의 친구들은 지금은 어디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사이가 되었다. 학교 다닐 땐 저 자리에 모인 저들과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저 사람들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2011. 3. 13.